최근 이색적인 풍경이 벌어졌다.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에 항의하며 총리 관저 앞과 국회 중의원 회관 앞 등에서 시위를 하기 시작한 일본 시위대들 사이에 LED 촛불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명백하게, 일본인들도 방송보도를 통해 면밀하게 접했던 2016년 가을 한국의 대규모 광장 촛불시위를 참조한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공문서 위조 스캔들로 확대된 자국의 정치적 스캔들이 최순실 스캔들에 비견할 만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다른 아시아 지역에 영향을 미친 것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다. 당장은 한국인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1919년의 3.1 운동부터 그러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영향력은 과거에는 제3세계, 한국인들이 생각하기에 자신들보다도 정치적 발전이 늦은 나라에 파급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요즘의 추이는 그것과도 다소 다르다. 가령 2014년 홍콩에서 벌어진 우산혁명의 주도세력 중 일부도 한국의 사회운동의 영향을 받은 이들로 알려졌다. 2005년 홍콩에서 반세계화 시위가 벌어질 때 한국의 사회운동 세력이 홍콩 경찰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투쟁하는 것을 보고 감화받아 자생적 사회운동 세력이 된 젊은 세대 일부가 있다는 식이었다.
 
일본의 상황이 주는 감화는 그것과도 질적 차이가 있다. 흔히 ‘구한말’이라 불리는 조선왕조 말기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자생적 근대화 노력은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후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한 것은 일본이었다. 메이지유신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근대화과정은 서세동점의 시기 제3세계 국가가 식민지가 되지 않고 근대화를 수행하는 모범적인, 거의 유일한 사례를 보여주었다.
 
에도막부 시대부터 난학이 성행하는 등 조선왕조와의 질적 차이가 있다는 분석도 설득력이 있지만 일본 개항을 주도했던 미국이 남북전쟁으로 인해 사정이 복잡했다는 우연적인 요소도 작용했다. 비서구국가 중 유일하게 제국주의 열강으로 떠오른 일본의 사정은 결과적으론 세계대전 패배의 비극으로 귀결되긴 했지만 식민지 경험을 하게 된 한국인들에겐 열등감의 대상이었다.
 
한국의 20세기, 특히 해방 이후 20세기 중후반의 역사는 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처절한 노력으로 점철됐다. 박정희 시기 경제관료들의 회고를 보면 일본 고도성장기의 관료집단이 그랬듯 선진공업국으로의 추격에 대한 우스꽝스러울 정도의 진지한 애국심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거의 유일한 방법을 일본의 경험을 참조하여 만들어 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들의 자부심에는 일정한 근거가 있었다. 이후 중국의 고도성장, 그리고 최근 일어나는 베트남의 고도성장에 한국의 모델이 미친 바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비서구국가 중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개발연대의 최우등 모범생이 된 한국은 이후 민주화의 경로로 진입했다. 한국의 정계에선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가 서로 상대방 세대의 공로를 인정하지 못해 다투기도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분명한 성과이며 양자를 공고하게 하는 데 역할을 한 것도 타당하다.
 
후세대들로선 그 모든 성과를 이어받아 자신의 삶이 지탱된단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한류 역시 그 바탕 위에서 불기 시작한 바람이었다. 그리고 대중문화의 유행을 넘어 한국의 근대화를 주도했던 바로 그 일본에 정치적 시위의 양식이 수출되는 현실은, 서구와 일본을 추격해 왔던 한국 근대화 성과의 어떤 궁극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아득하기까지 하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