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경무국으로 출발…治安 첨병 역할
정권 하수인’ 오점도…인권 경찰 변모 기대

 
지난달 16일 울산지방경찰청이 울산시청을 압수수색한 것과 관련해 경찰을 ‘정권의 사냥개’라고 비난한 자유한국당 장제원 수석대변인에 대해 최근 현직 경찰관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현직 경찰관 온라인 모임 폴네티앙은 같은 달 23일 성명서를 내고 “공당의 대변인 위치에 있는 분이 대한민국 경찰관들을 ‘정권의 사냥개’와 ‘몽둥이가 필요한 미친 개’로 만든 것과 관련, 14만 경찰과 전직 경찰, 그리고 그 가족들은 모욕감을 넘어 참담한 심정”이라고 밝혔다.
 
또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적법한 경찰 수사를 흔들고 있다”며,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훼손하려는 언행을 삼가라”고 덧붙였다. 장 대변인의 발언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도 요구했다.
 
앞서 장 대변인은 울산경찰청이 울산시청을 압수수색한 것에 대해 6.13 지방선거를 앞둔 ‘정치공작’이라며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울산청은 현재 김기현 울산시장 동생의 비위 의혹을 수사 중이다. 장 수석대변인이 비난한 대로 경찰이 과연 ‘정권의 사냥개’ ‘몽둥이가 필요한 미친 개’일까?
 
그간 우리 경찰의 역사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한 부단한 노력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모습은 어떤 때 어떤 곳에선 ‘민중의 지팡이’라는 애칭에 걸맞은 모습으로, 또 다른 시·공간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폭압적인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해방 직후 창설된 경찰이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본연의 모습으로 가는 데 놓인 과제를 살펴본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뒤 경무국, 경무부, 치안국, 치안본부 시대를 거쳐 오늘의 경찰청 시대까지, 경찰은 민생 치안(治安)의 최일선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는 역할을 맡아왔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출발함으로써 좌우(左右) 이념 대립과 한국전쟁, 독재정권 등 혼란스러운 시대를 거치며 때론 ‘민중의 지팡이’란 본분(本分)을 저버리고 ‘정권의 하수인’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경찰은 이제 ‘인권경찰’로 거듭나고 수사권 조정을 통해 검찰과 함께 독립된 수사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치안 소비자인 국민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서려는 일대 쇄신을 꾀하고 있다.
 
경찰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동시에 미(美) 군정이 들어서자 그 해 10월 21일 미 군정청 산하에 경무국, 각 도(道) 밑에는 경찰부 형태로 출발했고 당시 경찰관 수는 4천 820명 가량으로 지금(9만 6천명)의 5%에 불과했다.
 
해방 후 치안 수요에 비해 인력이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의 경찰관 출신이 ‘태평양미군 총사령부 포고 1호’에 따라 대부분 현직에 남았다. 경찰 역사의 ‘원죄(原罪)’로 꼽히는 부분이다.
 
경찰은 초기 좌우 대립과 이로 인한 사회 혼란, 테러, 요인 암살 등을 막는 데 주력하는 한편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초를 다졌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 초기 측근들이 경찰 고위직에 앉아 1946년 11월 과도 입법위원 선거와 1948년 5월 총선에서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데 앞장서는 오점(汚點)을 남겼다.
 
경무국은 1946년 1월 경무부로 승격됐다가 1948년 9월 내무부 치안국으로 개편된 뒤 3년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태백산 및 지리산 경찰전투사령부’가 임시 창설됐고 ‘구국호국경찰’이란 이름으로 공비토벌작전을 벌이다 경찰관 1만여 명이 순직한 일도 있었다.
 
경찰은 이승만 정권 시절 국민보다 정권 비호에 급급해 ‘정권의 하수인’으로 불렸다. ‘3·15부정선거(1960년)’ 때는 관권선거(官權選擧)에 동원됐고, 이에 항의하는 시민을 과잉 진압해 김주열 군이 마산 앞바다에 주검으로 떠올라 ‘4·19혁명’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1970년대 내무부 치안국에서 치안본부(1974년)로 직제 개편이 이뤄져 대구와 인천에 경찰국이 따로 세워지고 서울·경기·전남 등 지방경찰국장의 직급도 상향 조정됐으며 경찰서 인력도 보강되는 등 본격적인 조직 확대가 시작했다. 치안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경찰 업무도 다양화돼 1981년 7월 정보·대공 기능을 전담하는 독립 부서가 생긴 데 이어 1986년 10월 직제개편으로 정보와 대공 업무가 다시 분리됐다.
 
1972년 경찰전문학교에서 승격된 경찰대학은 1979년 4년제로 바뀌면서 이후 ‘경찰 자질론’을 잠재우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 기간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로 경찰이 시국경비에 치중한 시대였다.
 
1972년 ‘10월 유신(維新)’으로 국회 해산, 정당활동 금지,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1974년 초에는 긴급조치가 4호까지 잇따라 선포되면서 서슬퍼런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 한가운데 경찰이 있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뒤에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각종 집회·시위가 급증하고 격렬화되면서 민생(民生)을 도외시한 ‘진압경찰’의 면모가 그 절정에 달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1986년),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1987년), 이한열군 사망사건(1987년), 강경대군 치사사건(1991년) 등 온나라를 뒤흔든 대형 시국사건이 잇따랐다. 1980년대 인권 탄압의 상징이었던 경찰청 남영동 보안분실에는 수많은 민주 인사와 시국 사범들이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1991년 8월 대통령령에 의해 치안본부가 경찰청으로, 지방경찰국이 지방경찰청으로 이름이 바뀌기 시작했고 이후 조직 명칭과 역할이 변경되면서 지휘부 인력을 감축하고 일선 치안인력을 보강하는 쪽으로 개편됐다. 일선 치안을 담당하는 ‘계(係)’, ‘과(課)’ 등의 조직이 기능과 역할에 맞춰 통합 또는 분산돼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경찰은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건, 1995년 대구지하철 폭발사건,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2003년 2월 대구지하철 참사 등 대형 사건·사고의 최일선에서 헌신적인 노력을 벌이기도 했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 연쇄살인사건 등 흉악 범죄가 발생했을 때는 수사력을 발휘해 범인을 검거했고 묵묵히 현장에서 일하는 경찰의 모습은 때론 귀감이 되기도 했다. 사회 발달과 범죄의 고도화·지능화·흉포화에 맞춰 첨단 수사시스템이 요구됨에 따라 경찰은 과학수사 기법 개발에 주력하고 있지만 전국을 공포에 떨게 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 등 해결되지 않은 미제사건도 많이 남아 있다.
 
최근에는 과거 ‘순사’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인권경찰’로 거듭나려는 노력을 하는가 하면 수사권 조정 노력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방분권시대를 앞두고 ‘틈새치안’까지 맡게될 우리 경찰이 사회적 약자 보호와 기초질서 확립, 생활밀착형 치안서비스로 진정한 ‘민중의 지팡이’로 거듭날 것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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