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어떤 사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매개체였다. 성경에 나오는 최초 인류의 이름은 ‘아담’이다. ‘아담’의 뜻은 ‘사람’이다. 처음부터 이름은 정체성이고 표상이었다. 그래서 이름은 신성하게 여겨졌다. 유교문화권에도 자신보다 높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거나 쓰는 것을 금기시했다.
 
조선의 왕들은 불편함을 줄이고자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 한자로 왕자의 이름을 짓곤 했다. 이성계(成桂)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 자주 쓰이는 글자라 이단(旦)으로 개명했다. 사람들은 자신보다 높은 권위를 사용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빌리곤 했다. 권력의 행사는 왕의 이름으로, 기도는 신의 이름으로 했다.
 
6월 13일 치러지는 지방선거에서도 이름에 관한 논쟁이 한창이다.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비해 지방선거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다. 본격적인 선거기간 전까지는 광역지방자치단체장을 제외한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 간 인지도는 차이가 없다. 모두 낮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자신보다 높은 그리고 유명한 이름으로 자신을 꾸미는 것이다. 후보들의 이름을 건 경쟁이 아니라, 각 후보들이 내세운 이름 간의 대리전이다.
 
후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이름은 현 대통령 문재인이다. 국민들은 국정운영에 대해 높은 만족도를 보이고, 평창동계올림픽은 잘 치러졌다. 남북정상회담까지 목전에 두고 있다. 당분간은 대통령의 이름보다 빌려 쓰기 좋은 이름은 없어 보인다.
 
여당세가 강한 일부 지역에서 대통령과 얼마나 가까운지가 당선을 결정한다는 말도 공공연하다. 어떤 구청장선거구에선 선거통계시스템에 등록한 여당후보 5명의 경력란에 대통령의 이름이 모두 들어 있다.
 
차명대리전(借名代理戰)은 효과가 있어 보인다. 특정지역에선 대통령의 이름이나 대선 후보 시절의 선대위 경력이 들어가면 지지율이 10%가량 상승하는 내부결과도 있었다. 청와대 출신 출마자들이 특히 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경력을 쓸 수 있는 후보와 쓰지 못하는 후보들 간 갈등도 발생했다.
 
후보 선정을 위해 경선을 수행하는 더불어민주당은 이 문제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지난 4일 비공개 회의에서 전·현직 대통령의 이름이 들어간 경력을 경선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방안이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추미애 대표는 결정된 바가 없다고 밝히는 등 혼란이 있었다.
 
결국 6일 최고위에서 경선 여론조사 시 후보자의 대표 경력에 전·현직 대통령의 이름을 넣을 수 있도록 확정했다. 다만 이는 청와대 근무자나 장·차관 출신에 한정해 허용된다고 한다.
 
무엇인가 빌려 쓴다면 빌려 쓴 것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 쓴다면 그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지방선거에서 빌려 쓴 이름에 대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름 자체가 현 정권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선거의 승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지방선거 도입의 취지는 풀뿌리 민주주의 확립이다. 후보자들은 자신에게 이름을 빌려준 사람에 앞서 국민들에게 당선의 책임을 져야 한다. 당선자들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은 당선자가 아니라 이름을 빌려 준 사람을 비난할 것이다.
 
이름을 빌려 쓴 후보들은 국민들과 대통령 양측에 책임을 져야 한다. 훼손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대통령의 이름이고, 피해자는 그 이름을 신뢰했던 국민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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