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주 김윤환 전 민국당 대표의 죽음도 인생과 권력의 무상함을 절감하게 하는 쓸쓸한 임종이었다고 측근들은 전한다. 허주의 상가는 사흘간 적지않은 정치인이 얼굴을 내밀었지만 잠시 인사치레를 하는 정도였다. 사흘간 빈소를 지킨 한나라당 신경식 의원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사무실은 정치인 언론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는데…”라며 원망어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객의 죽음의 끝은 이렇게 무상하지만 그가 못다한 얘기들이 내년 1주년 추도식을 즈음하여 회고록으로 발간될 전망이다. 회고록은 경제와 정치 두 분야로 나눠질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허주는 경제분야를 위해 3공 관계자들을 많이 만났던 것으로 전해지며 정치분야엔 이회창 정몽준 JP 부분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0월 연세대병원에 입원해있던 허주의 병실에 이회창씨가 부인과 함께 찾아와 지난 일을 사과했다고 한다.

윤원중 전 민국당 사무총장은 “이날 허주는 이회창씨의 방문에 ‘미국에 있다더니 언제 왔어요?’라며 희미한 정신을 추스렸다”고 전했다. 하지만 용서를 비는 이회창씨에게 허주는 끝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윤 전 총장은 “그것은 어쩌면 이제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허무한 깨달음이었을 수도 있다”며 착찹했던 그 순간을 전했다.킹메이커로서의 화려한 이력도, 정치판에서 생겨난 모든 은혜와 원한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얘기로 받아들여진다.허주와 이회창씨와의 정치인연은 애증의 7년이었다고 측근들은 회고했다. 지난 대선때 허주는 회고록을 집필, 유력 대선주자였던 이회창씨를 겨냥했다는 소문도 나돌 정도였다.

회고록에 언급한 내용이 당시 대선에 직간접적으로 몸담고 있던 정치권 인사들인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측근들이 전하는 허주의 회고록에는 당시 이회창 전총재의 측근들이 집요하게 화해를 시도했다는 내용이 언급됐다. 서상목 전의원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허주를 여러번 찾아가 이 전총재와의 화해를 권유했으나 냉랭한 답변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그때 허주는 “이 총재가 먼저 공개사과를 해야 하는데 공개사과같은 것을 할만한 사람인가”라며 “공개사과부터 먼저 있어야 하고, 화해 여부는 그 다음 문제”라고 일축했다는 것.이후 박희태 김진재 신경식 의원 등 이 전총재 측근들이 수차례 허주를 만나 이 전총재와의 화해를 권유했지만 끝내 마음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한승수 의원은 “허주는 2000년 이후 심적 고통이 심했다” “1997년 ‘비(非)영남후보론’을 설파하며 이회창씨를 대통령 후보로 만들었으나 2000년 2월 이회창씨와 그의 측근들은 소위 ‘공천개혁’이라는 미명하에 그를 밀어낸 게 깊은 상처로 남아있었다”며 허주가 이 전총재와 구원(舊怨)을 풀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았다. 이 전총재가 허주와 화해를 시도한데는 허주가 정치 비사를 담은 자서전을 쓰면서 이 전총재를 비난하는 역풍을 차단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맥락에서 허주의 측근들은 이 전총재의 아킬레스건을 회고록에 담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른바 이 전총재의 97년 대선 자금 부분이다.

윤 전총장은 이 문제에 대해 머리를 가로 젓지만 민국당 관계자들은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민국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얘기했다.“회고록에서 이 전총재와 관련한 부분은 ‘정치적 신의’로 집약된다. 밥 먹듯이 이뤄지는 게 정치판의 배신이라지만 거기에도 최소한 ‘신의’와 ‘격’이 있어야 한다.” 이 관계자가 던진 이 화두는 허주와 이 전총재와의 협력과 갈등, 그리고 이 전총재에게 배신당한 한(恨)을 그대로 표현한다. 허주는 이 전총재와의 지난 7년을 애증으로 회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95년 이회창 총재 영입, 대세론 형성, 신한국당 총재와 대선 후보 만들기, 대선 출마, 대선 패배, 98년 총재 복귀, 이후의 갈등과 불화, 2000년 총선 공천 탈락 등도 언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고록에는 정몽준 의원에 대한 감회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윤 전총장은 “허주는 7월부터 ‘정몽준’ 대안론을 입에 달고 살았다”며 “정몽준 신당에 대한 의지가 워낙 강해 다른 준비는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허주가 정몽준에 대한 미련을 버린 것은 윤 전총장이 정몽준 의원 캠프에서 철수하며서부터로 전해진다. 허주는 민국당과 정몽준 신당과의 무리한 통합 추진에 따른 내부 반발이 문제로 지적되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정 의원이 민국당을 구정치인으로 분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고 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들은 이후 다시 합류를 시도할 수도 있었지만 자존심을 구긴 허주가 정의원측에 다시 손을 내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 의원과의 연대가 무산되는 시점에서 허주가 준비중인 회고록 출간을 연기했다고 윤 전총장은 전했다. 이와관련 정치권에서는 당시 “이회창을 겨냥한 것으로 알려진 자서전을 포기했다면 뭔가 사연이 있지 않겠느냐”는 의문이 일었다. 이 시점과 맞물려 민국당에서 탈당했던 한승수 의원이 한나라당에 입당, 허주가 이 전총재쪽으로 기운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한 의원은 “당은 떠났지만 정치적으로 허주와 절연한 것은 아니다”라며 “한나라 입당 전 정몽준 의원의 적극적인 구애를 받았지만 선택의 순간, 허주의 조언이 영향을 끼쳤다”고 회고했다.당시 허주가 서청원 의원과 비밀리에 회동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회고록에는 대선당시 자민련과의 연대를 심각하게 고려한 내용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허주는 지난 2002년 2월초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 민국당 양당의 ‘통합’을 적극 추진했다고 측근들은 전한다.민주당이 정계개편에 대해 결론을 내지 못할 경우 자민련과 민국당이 먼저 통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통합해서 새 정당이 만들어지면 당 정강에 내각제 개헌을 명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계산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측근들은 전했다. 자민련 관계자는 “당시 (내각제) 신당 창당이 안될 경우 자민련과 민국당이 먼저 통합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키로 원칙적인 합의를 봤다”고 말해 양측이 이 문제와 관련, 여러 차례 회동을 가졌음을 시사했다.

허주는 신당을 창당하면 이수성 전총리 등 내각제 지지론자들도 함께 동참시킨다는 계획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그러나 자민련 김종필 총재는 지난해 2월 부산·경남지역을 방문한 자리에서 양당통합 문제와 관련, “간간이 개인적으로 그런 의사를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에 그쳤을 뿐”이라며 “어느 당과도 합당이란 말을 해본 적이 없다”고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보인데 대해 허주가 아쉬워했던 것으로 측근들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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