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하게 트여 햇살이 쏟아지는 이라선의 외관>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늦잠에서 깨어나 뒹구는 일요일이다. 내 생이 일요일 같기만 하다면 나는 생을 위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시간이다.
 
박정대 시인이 쓴 ‘생의 일요일들’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일요일처럼 고요하고 평온한 매일이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바람이 담긴 사진책방이 있다.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에 위치한 사진책방 이라선이다.
 
<서가에 꽂힌 많은 책들. 전부 사진집이다. 사진제공: 이라선 인스타그램>
          
이라선은 통의동에서도 조금 더 깊숙한 곳에 위치했다. 여러 갤러리 골목 사이를 사색하며 거닐다 보면 이 곳의 아담한 입간판이 보인다. 이보다 먼저 눈에 닿는 건 통유리로 환히 트인 외관. 이 모습이 통의동의 잠잠한 정취와 절묘하게 어우러져 하나의 멋진 그림처럼 느껴진다.
 
조용해서 참 좋다. 이 곳을 방문한 기자의 첫인상이다. 이렇게 말문을 열자 이라선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김현국 씨는 “(개업) 당시에 많이 지쳐있었다. 우리 스스로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이라선은 사진작가 김현국 씨와 미학을 공부하는 김진영 씨 부부가 함께 운영 중이다.
 
이라선이라는 서점 이름 역시 이런 마음에서 비롯돼 지어졌다. 만화책에서 본 ‘이지 라이크 어 선데이(Easy like a Sunday)’라는 구절에서 빌려왔다고. 하지만 개업하는 날 방문했던 친구들이 뜻을 듣더니 “(서촌에서 영어 이름은)아닌 거 같다”면서 새로이 뜻을 지어준 게 지금의 이라선이 됐다.
 
그 뜻은 바로 떠날 이, 아름다울 라, 배 선. 직역하면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배’인데, 이곳이 책을 보며 아름다움을 찾아 떠나는 배 같은 공간이 되길 소망하며 지어줬다.

 
<스탠드의 간접조명이 따뜻한 느낌을 준다. 사진제공:이라선 인스타그램>
             
통의동이라는 위치도 독특하다. 많은 동네서점들이 이대, 신촌, 합정 또는 이태원 해방촌 인근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자리 잡게 된 계기를 묻자 현국 씨는 “이라선을 만들기 위해 3개월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공간을 알아봤다. 그런데도 마음에 드는 곳이 없어 지쳐있던 찰나 문득 ‘내가 좋아하는 서점이 어디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현국 씨가 좋아했던 서점은 ‘가가린’으로, 현재는 사라졌지만 통의동에 있던 1세대 독립서점이다. 가가린을 추억하며 찾은 이 통의동에서도 지금 이 장소가 이라선으로 거듭날 수 있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풍경’이다. 현국 씨는 “여기 들어와 밖을 바라보니 하나의 사진 같았다. 이 하나 때문에 바로 (여기) 계약한다 말했다”고 장소와의 첫 만남을 기억했다.

 
<초록색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와 기분을 밝게 한다. 사진제공:이라선 인스타그램>

장소와 공간성은 현국 씨의 중요한 테마다. 이라선을 구성하는데 있어서도 이 부분을 큰 축으로 삼았다. 현국 씨는 “어떤 공간에 갔을 때 그 공간(에 대한 느낌)을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냄새, 피부, 소리, 향기, 빛 여러 가지가 합쳐진 게 공간이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라선을 만들 때) 가장 신경 썼던 건 인테리어”라고 이야기했다. 둘러보니 공간 곳곳에 묻어있는 세심한 손길이 보였다. 선명한 초록색의 라운드체어, 블랙 앤 화이트의 깔끔한 톤, 나무의 따뜻함이 적절히 조화를 이뤄 모던한 공간으로 마련됐다. 이라선이 편안하고, 언제나 옆에서 책을 꺼내 볼 수 있는 이런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꾸며갔다고.
 
서점의 편안한 분위기는 운영자인 현국 씨에게도 오롯이 배어나온다. 기자가 사진집은 다가가기 어려운 분야라 고백하자, 현국 씨는 직접 일본 사진작가 ‘린코 카와우치’의 사진집을 가져와 사진에 담긴 의미들을 설명해줬다. 나직하게 전달해주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사진집에 담긴 사진들이 단일한 파편이 아닌 전체적인 서사로, 하나의 만남으로 다가오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윌리엄 이글스턴의 가이드(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스크랩북(우). 사진제공: 이라선 인스타그램>
        
이어 현국 씨는 윌리엄 이글스턴의 ‘가이드(Guide)’,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스크랩북(Scrap book)’,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셀프-포트레이트(Self-portrait)’ 세 권을 추천했다.
 
윌리엄 이글스턴은 흑백사진만을 인정하던 시기에 최초로 사진에 ‘컬러’를 입히고 일상의 미학을 사진에 가져와 사진사(史)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스크랩북은 모마(MoMA·뉴욕현대미술관) 전시를 위해 그가 직접 가져갔었던 스크랩북을 그대로 재현한 사진집이며, 로버트 메이플소프는 극적인 삶을 살아간 인물로 자신의 개인전이 열리기 직전에 숨졌다는 비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이처럼 이라선에 오면 진영 씨와 현국 씨의 ‘북 큐레이팅’ 덕분에 사진집을 진입장벽이 높고 어려운 분야라 느끼는 많은 이들도 사진집과 가까워질 수 있다. 방문객과 사진집에 관해 함께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시간은 이라선만의 차별점이기도 하다.

    
<북토크를 진행하는 모습. 사진제공:이라선 인스타그램>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 사진 속의 숨겨진 단서들을 찾는 묘미도 있지만, 두 사람의 북 큐레이팅이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사진에 향한 두 사람의 애정이 듣는 이에게도 분명하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현국 씨 역시 “방문한 분이 ‘저는 사진에 대해 잘 모르는데 추천이나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을 때 (그분께) ‘어떤 책, 어떤 사진 좋아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책을) 추천해드리면 너무 행복해 한다. 그 감정이 나에게도 느껴지고, 에너지가 된다”고 큐레이팅의 뿌듯함을 설명했다.
 
이어 “내가 이 책을 보면서 느꼈던 행복한 감정을 이 사람도 느끼게 되고, 그런 감정을 우리를 통해 느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이라선의 문 앞 풍경. 사진제공: 이라선 인스타그램>

이라선이 ‘사진책방’이 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사진집만을 취급하는 이유를 묻자 현국 씨는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것, 잘 아는 것을 하자”는 마음으로 이 공간을 사진집으로만 채워갔다고 말했다.
 
“잘 아는 것을 하자”는 다짐은 정성 어린 도움말로 이어졌다. 기자가 서점 개업을 생각하고 있는 이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를 묻자 현국 씨는 “(지금은)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세상”이라 말하며 “지금 당장 주목받는 일이 아닌 사소한 것일지라도, 한 분야에 스스로가 자신 있게 ‘전문가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면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생각을 전했다.
 
사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곳에서는 어수선한 세상의 소리와 잠시 틈을 가질 수 있다. 이 틈새로 들려오는 소리를 박정대 시인의 말을 다시금 빌려 표현해보고자 한다. 그건 바로, ‘생의 일요일들이 내게 고요히 다가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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