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설(序說)

무신정권과 ‘원간섭기(元干涉期)’
고려왕조 약 5백년(34대 475년) 간은 언제나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며 발전한 역동적(力動的)인 역사였다. 고려는 몇 차례에 걸쳐 지배세력이 교체되며 사회 발전이 이루어졌다. 초기의 호족시대(豪族時代)에서 왕조의 기반이 확립되자 귀족사회(貴族社會)로 넘어갔고, 다시 무신정권과 몽골의 지배를 거치면서 권문세족(權門勢族)이 집권하게 되었으며, 이후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 세력이 대두하기에 이르렀다.
권문세족의 집권과 사대부 세력의 대두로 특징 지어지는 ‘원간섭기(元干涉期)’는 우리에게 슬픈 질곡(桎梏)을 안겨준 역사의 한 시기이다. ‘자주성을 잃은 고려’라는 미증유의 민족수난기를 살다간 주인공의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 시대에 이르기까지의 고려사(高麗史)를 개관해 보기로 하자.
태조 왕건(王建)이 918년에 건국한 고려는 제 11대 문종(文宗, 재위 1046년~1083년) 때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면에 걸쳐 ‘고려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1115년 요동 북부지역에서 새롭게 일어난 여진족의 금(金) 나라가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함으로써 송(宋960~1279)·요(遼907~1121)·금(金1115~1226) 3국 간에 동북아의 패자를 가리기 위한 절체절명의 풍운이 일었으나, 고려의 입장에서는 기존 질서를 벗어나 국운을 융성시킬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고려는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였다. 외부의 위협이 사라지자 외치보다는 내치가, 상무(尙武)보다는 숭문(崇文)의 기풍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무릇 한 나라가 안정된 바탕 위에 융성해 나가려면 공자(孔子)가 주역(周易)의 괘를 설명한 계사전(繫辭傳)에서 제시한 ‘삼불망(三不忘)’을 지켜야 하는 법이다. 즉 나라가 안정되고 편안하더라도 위기가 찾아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고(安而不忘危 안이불망위), 나라가 잘 유지되고 존속되어 가더라도 망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며(存而不忘亡 존이불망망), 나라가 잘 다스려지더라도 전란이나 혼란이 올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治而不忘亂 치이불망란).
그러나 안일이 오래 계속되면 문약과 사치로 흐르게 되는 것은 고금(古今)의 역사가 증명한다. 문종 이후 한 세기 동안 지속되던 고려의 귀족사회는 12세기에 이르자 ‘삼불망’을 망각하고 지배층 내부의 대립과 분열이 심해졌다.
고려는 숭문천무정책(崇文賤武政策)으로 무반(武班)에 대한 차별이 심하였다. 문신들은 높은 벼슬과 권력을 차지하고 군대의 최고 지휘권까지도 쥐었다. 거란과 여진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서희(徐熙), 강감찬(姜邯贊), 윤관(尹瓘) 등은 모두 문신이었다.
무반의 최고 벼슬인 상장군(上將軍)도 정3품밖에 안 되어 재추회의(宰樞會議, 정3품 이상의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밀’이 모여 현안을 논의하던 회의체) 참석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고, 심지어 장군조차 문신의 향락생활을 보호하는 호위병으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무신들의 불만은 점점 높아 갔다. 아울러 문신귀족의 횡포와 수탈은 농촌경제를 크게 압박해 유민(流民)이 속출하고 농민반란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동요하였다. 마침내 고려의 귀족사회는 문치가 극에 달한 1170년에 일어난 무신란(武臣亂)에 의해 붕괴된다.
제18대 의종(毅宗)은 말년에 문신 및 환관들과 어울려 유흥에 깊이 빠져, 지나치게 불교·음양설·선풍(仙風)을 중요시하고 유교를 멀리하는 등 조선조의 연산군과 같은 난정(亂政)으로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 때문에 ‘왕명이 모두 고자(鼓子)한테서 나온다’고 할 정도로 의종 후반기는 환관들이 좌지우지하는 ‘환관정치’ 시대였던 것이다.
1170년(의종 24) 4월 어느 날이었다.
화평재(和平齋, 개경에 있던 재실)에서 의종이 문신들과 밤늦도록 연회를 베풀고 시주(詩酒)를 즐기자 견룡군(牽龍軍, 궁궐 수비대)의 행수(行首)로 있는 산원(散員, 정8품의 군관) 이의방(李義方)과 이고(李高)는 상장군 정중부(鄭仲夫)에게 정변을 일으킬 것을 제의했다.
먼저 이의방이 무신들의 참담한 처지를 토로했다.
“상장군, 오늘날 문신들은 자기네 세상이라고 기고만장하고 있습니다. 문신들은 배부르게 취하고 노는데 무신들은 배고프고 힘만 드니 이를 참을 수 없습니다.”
이어 이고는 앞으로의 행동 통일 방향에 대해 말했다.
“무신들이 문신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쳐 문신들의 오만방자함을 응징하면 능히 오늘의 참담한 처지를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중부(鄭仲夫)는 이의방과 이고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줄도 모르고 의종은 지금도 스스로 ‘태평세월에 글을 좋아하는 임금(太平好文之主 태평호문지주)’을 자처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일세. 나도 자네들과 생각이 같으니 뜻을 함께하세.”
정중부는 이의방과 이고가 내심 마음 든든했다. 그는 견룡대정(牽龍隊正, 친위부대 수장) 시절에 문신인 김돈중(金敦中)이 자신의 수염을 태운 일을 잠시 회상했다.
1157년(인종11년) 겨울의 일이었다.
김돈중은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해서 권력을 잡은 부친 김부식(金富軾)의 세도를 믿고 안하무인 격으로 경거망동하는 자였다.
인종(仁宗)이 제석(除夕, 섣달 그믐밤) 전날 궁중에서 열린 나례(儺禮, 악귀를 쫓기 위하여 베푸는 의식) 행사장에서 정중부의 수염을 보고 ‘가히 대장군의 재목이다’ 라며 칭찬을 하자 김돈중이 이를 시기하여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웠다.
성미가 남달리 괄괄한 정중부가 수염에 붙은 불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끄며 김돈중에게 말했다.

“이 고약한 놈! 감히 누구에게 이런 못된 짓을 하는 것인가!”
“무관 따위가 수염을 기르다니 건방지구나!”
“뭐가 어쩌고 어째? 이 죽일 놈아!”
정중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김돈중을 늘씬 두들겨 패 주었다. 그러나 골수에 사무친 한은 영원히 풀리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고 대노한 재상 김부식은 정중부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인종의 중재로 정중부는 벼슬이 강등되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다.
정중부는 속으로 이를 갈며 절치부심(切齒腐心)했다.
‘문관 놈들 어디 두고 보자. 너희가 임금을 감언이설(甘言利說)로 현혹하여 권세를 누리고 있지만, 난 오늘의 치욕을 결코 잊지 않겠다. 세월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다. 때가 되면 꼭 원수를 갚아 주리라.’
1170년 8월(의종24년) 24일 밤.
의종이 밤늦도록 연회를 즐기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다시 모여 거사를 단행하기로 약조했다.
“왕이 만약 여기를 떠나 환궁하거든 거사를 다음으로 미루고, 그렇지 않고 보현원(普賢院, 황해도 장단長湍에서 남쪽으로 25리 떨어진 곳에 위치)으로 옮겨가거든 바로 실행에 옮긴다.”
다음날. 초가을 한낮의 뜨거운 햇살도 한풀 꺾여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의종의 행차는 오문(五門)을 떠나 전날의 연회에 이어 연복정(延福亭)과 흥왕사(興王寺)를 거쳐 보현원으로 행차하였는데, 의종은 행차 도중에 자신과 문신들을 호종한 무신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현원 근처 활터에서 명령했다.

“정말 이곳의 풍광은 장관이로구나. 이 아름다운 곳에서 오병수박희(五兵手博戱, 5명이 1개조가 되어 무예를 겨룸)로 무예를 겨루게 하라.”
이의방은 군사들을 동요시킬 목적으로 대장군 이소응(李紹膺)과 대련을 앞둔 하급무관 석린(石隣)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대장군 이소응을 봐주지 말고 실제로 싸워야 한다.”
나이 50이 지긋한 이소응은 노쇠하여 석린과의 대결에서 이기지 못하고 달아났다.
이 때 젊은 문신 기거주(起居注, 왕의 주변을 기록하는 관리) 한뢰(韓賴)가 이소응의 뺨을 후려갈기며 외쳤다.
“평생을 무부(武夫)로서 지낸 대장군이 어찌 이토록 무기력한가!”
의종과 총신인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어사대의 종4품) 이복기(李復基), 승선(承宣,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는 정3품) 임종식(林宗植) 등은 아무 생각 없이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무관들은 모두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고 분노에 치를 떨며 정중부를 주목했다.
참다못한 정중부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큰소리로 한뢰를 꾸짖었다.
“이소응이 비록 무부이기는 하지만 그의 벼슬이 종3품인데 어찌 나이 어린 자가 대장군의 뺨까지 치며 심한 모욕을 주는가!”
정중부의 말이 떨어지자 성질 급한 이고는 칼집의 칼을 소리 나게 뽑는 척하며 정중부의 눈치를 살폈지만, 노련한 정중부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의종이 정중부의 손을 잡고 위로하여 마음을 풀게 하였지만 이로써 문신들의 차별에 시달리던 무신들의 불만은 폭발하고 만다.
그날 저녁, 가을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보현문에 먼저 도착한 이의방과 이고는 임금의 명을 사칭하여 순찰과 치안 유지가 주된 임무인 순검군(巡檢軍)을 모았다.
의종의 행차가 막 보현원 문으로 들어가자 이의방과 이고가 총신 이복기와 임종식 등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를 역사에서 정중부의 난, 무신정변 또는 경인란(庚寅亂)이라고 부른다.
도끼눈을 부릅뜬 정중부의 눈에 의종은 이미 임금이 아니었다. 그는 두려움에 혼비백산해 있는 의종을 향하여 분노의 음성으로 일갈했다.
“상감, 왕의 총애를 믿고 망동(妄動)을 저지른 한뢰가 왕의 침상 아래 숨어 있으니, 그를 어서 내어 놓으시지요!”
“……….”
의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중부의 뇌성 같은 목소리가 보현원을 진동하기 무섭게 성질 급한 이고가 달려들어 단칼에 한뢰의 목을 떨어뜨렸다.
그 후 정중부는 이고, 이의방 등을 데리고 대궐로 쳐들어가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문관의 관을 쓴 놈들은 비록 서리(胥吏)라 할지라도 모조리 죽여 씨를 남기지 마라!”

이 때 대장군 진준(陳俊) 같은 이는 더 이상의 학살을 극력 만류하기도 했다.

“우리들이 미워하고 원망했던 사람은 한뢰, 이복기 등 문신 4, 5명에 불과하다. 지금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도 너무 심한데, 하물며 처자임에랴!”

이때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조선시대 종친부에 해당하는 6품) 문극겸(文克謙)은 “왕이 만일 내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지경까지 되었겠는가?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죽여 달라!”고 당당하게 처신했으며, 직신(直臣, 기탄없이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자)으로 알려져 죽음을 면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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