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구정승 신정승’의 유명한 야사 한 장면을 살펴보자. 구치관(具致寬)이 처음 우의정에 제수됐을 때 세조는 당시 영의정이었던 신숙주(申叔舟)를 함께 불러 축하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질문에 바르게 답하지 못하면 벌주를 먹어야 한다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먼저 세조가 “신정승”하고 부르자 신숙주가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신(新)정승을 불렀는데 왜 신(申)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벌주를 주었다. 다음엔 세조가 “구정승”하고 부르자 구치관이 “예”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세조는 “구(舊)정승을 불렀는데 왜 구(具)정승이 대답하느냐”며 또 다시 벌주를 주었다. 다시 세조가 “신정승”을 부르자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에 세조가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감히 대답을 하지 않는다”며 두 정승에게 모두 벌주를 주었다.

풍류와 해학 그리고 군신 간의 격의 없는 술자리와 국정운영의 이면을 잘 나타내주는 명장면이다. 세조는 이 같은 소통의 장을 만들어 신(新)-구(舊) 정승이 화합 협력하여 조정을 잘 이끌어달라는 무언의 당부를 한 것이다. 이처럼 신-구의 조화로 국가 사회는 발전하고 역사는 전진하는 것이다.

그런데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공교롭게도 여야 모두 ‘심판론’을 꺼내들고 있다. 여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구적폐’ 청산뿐만 아니라 지방권력을 교체해야 진정한 정권교체가 이뤄진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야당은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경제·행정·사법·언론·교육 등 실정(失政)에 대한 정권심판론과 ‘신적폐’ 청산을 내세우고 있다.

‘적폐(積弊)’의 사전적 의미는 오랫동안 쌓인 관행·부패·비리 등의 폐단을 말한다. 이를 뿌리 뽑으려면 국가 전반의 혁신과 개조가 필요하고, 관련 책임자에 대한 문책과 처벌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어느 정권이나 임기 말이 되면 크고 작은 적폐가 켜켜이 쌓이게 마련이다. 그래서 수평적 정권교체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적폐청산에는 대상에 따른 차별이나 경중(輕重)이 있을 수 없다. 과거 정권의 적폐는 처벌의 대상이 되고 현 정권의 적폐는 축소·은폐의 대상이 되면 정치보복이 되고 법치가 무너진다. 오늘의 적폐청산 주체가 내일은 적폐청산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 세상의 이법(理法)이다. ‘일중즉이 월만즉휴(日中則移 月滿則虧,해가 중천에 뜨면 서쪽으로 기울고 달도 차면 이즈러진다)’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신적폐가 구적폐보다 더 엄중한 사례를 살펴보자. 현 정부 출범 후 ▲원전 졸속 중단 ▲최저 임금 급속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소득주도 성장으로 사회주의 배급제도 추진 ▲퍼주기 복지로 SOC예산 삭감 ▲세금으로 공무원 일자리를 17만개 증원 ▲청년실업 대란 등은 대표적인 경제 실정 사례다. 참여연대 출신 62명이 청와대 실장, 수석을 비롯하여 장관 등으로 임명되어 ‘문재인 정부와 참여연대 공동정부’라는 비유가 나온다(중앙일보). 그리고 공공기관 새 상임감사 63%가 ‘캠코더(대선캠프·코드인사·더불어민주당 출신)’에 의해 전리품 나누듯 배분되고 있다(문화일보). ‘노골적인 코드 훈장’도 문제다. 훈장 3순위 이석태 전 민변회장이 훈장 1순위 보수성향 하창우 전 변협회장을 제치고 지난 25일 ‘법의 날’ 기념식에서 최고 등급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이런 것들이야 말로 적폐 중의 적폐의 전형이라 하겠다.

최근 ‘김영란 법’ 제정에 앞장선 김기식이 피감기관 돈으로 여비서와 단 둘이 여러 번 외유를 다녀왔을 뿐 아니라 자기가 운영하는 연구소에 후원금을 기부하고 이를 월급으로 타 쓰는 편법을 저질러 금감원장직에서 물러났다.
또한 과거 정권의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관련자들은 모두 구속되었는데, 이번 ‘드루킹 게이트’의 중간총책 김경수 의원과 문재인 정권의 관련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국민은 예의 주시하고 있다.

더 황당한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문제의 당사자인 김기식을 “황희 정승 같은 사람”이라고 감싸더니, 김경수 의원을 “멋있다”고 칭송했다. 여권 전체의 ‘내로남불’식 도덕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오만방자한 사례고, 좌파 지지자들의 표만 얻으면 된다는 국민을 업신여기는 방약무인(傍若無人)의 자세다.

문재인 정권은 신적폐 청산은 오불관언(吾不關焉)하고 구적폐 청산에만 올인하고 있다. 이래서는 정권의 동력을 얻을 수 없다. 구적폐 청산을 빙자한 무자비한 정치보복은 결국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박근혜 전 대통령 취임 1주년 지지율은 68.5%, 같은 시기 김영삼 전 대통령 지지율은 69.5%였다. 지지율은 신기루 같은 것이다. 문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에 취한 오만한 집권 여당은 6.13 지방선거에서 어쩌면 그 높은 지지율만 믿다가 천인단애(千仞斷崖, 천 길이나 되는 깎아지른 듯한 벼랑)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자유한국당이 당사에 “우리도 그래서 망했다”는 배경막을 건 이유이기도 하다.

우종철 자하문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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