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이완구 전 국무총리에게 금배지는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지난 23일, 이 전 총리가 암시한 그의 ‘재기 플랜’은 세간(世間)의 예상을 웃돌았다. 당초 정치권은 그가 6월 재보선을 거쳐 중앙 정치 무대로 복귀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이 전 총리는 이 과정을 뛰어넘고 모든 시계추를 6.13 지방선거 이후로 맞췄다. 여의도 정가에는 지선 직후 홍준표 대표가 재신임을 묻는 방식으로 ‘조기 전당대회’를 열 것이라는 게 중론으로 자리매김해 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이 전 총리의 플랜은 시작된다. 충청권과 비홍계 의원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당권에 도전, 홍 대표의 독주를 저지한다는 계획이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성격이다.

다만 이 플랜에는 ‘한국당의 6.13 지선 참패’라는 조건 변수가 따라붙는다. 한국당이 지선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시 홍 대표의 리더십이 재평가될 공산이 높기 때문이다. 이에 일각에선 이 전 총리가 플랜 B까지 염두에 뒀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는다. 과거 김종필 전 총재가 민자당을 탈당, 자민련을 창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전 총리 역시 자체 세력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플랜 A든 B든 최종 목적지는 결국 한 곳을 가리키고 있다. 3년 만에 정치권에 복귀한 이 전 총리가 ‘충청 대망론’의 주인공, 즉 ‘대권’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평가다.

 

- 플랜 A: 충청 지역 선대위원장→당권→대권
  플랜 B: JP식 ‘독자 세력화’→대권 직행
- ‘홍준표 대항마’ 급부상한 이완구… 비홍계 ‘구심점’으로 전대 출마 가능성


‘성완종 리스트 사건’ 연루 의혹으로 여의도를 떠났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23일 충남 천안 재보궐 선거 불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이 전 총리는 이날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금까지 한 번도 당 최고지도부에게서 6.13 지방선거에 관한 말을 듣거나 제안받은 적이 없다”며 “저에 대한 (출마) 건의서가 올라간 건 언론을 통해 봤지만 단 한 번도 제안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에 대한 저의 불필요한 말이 지방선거를 앞둔 당의 절체절명의 입장과 혼선과 오해를 유발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며 “저는 이번 충남 천안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보 전진 위한 일보 후퇴,
洪과 전대서 충돌 불가피

 
그러나 이 전 총리의 이날 발언은 ‘불출마 선언’보다 사실상의 ‘정치 재개 선언’에 가까웠다는 게 정치권의 대체적인 평가다. 그는 재보선 불출마 뜻을 밝힌 직후 발언에서 “6.13 지방선거 이후 어떤 역할도 피하지 않겠다”며 당권 도전 뜻을 내비쳤다.
 
특히 “적어도 6.13 지방선거 전까지는 홍준표 대표를 중심으로 뭉쳐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 대목은 표면적으로는 홍 대표에게 힘을 싣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전 총리가 ‘홍준표 체제’의 유효기간을 지선 때까지로 한정시켰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차기 전대에서의 승리는 2020년 총선에서의 공천권을 쥐게 됨을 의미하고, 공천권은 곧 대선 후보로서 유리한 고지 점유를 뜻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18대 대선에서 패배했음에도 잠시 숨을 고른 뒤 당권을 거머쥐고 곧바로 대선 재수에 성공한 사실만 보더라도 당권이 대권행 급행 티켓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홍 대표가 공공연히 조기 전당대회 개최의 필요성을 시사한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조기 전대에서 재신임을 받고, 2020년 총선에서 공천권을 행사해 당내 세력 기반을 가다듬은 뒤 대권 재수에 나서려는 포석인 것이다. 이를 위해 홍 대표는 김문수·이인제·김태호 등 자칫 자신의 당권 가도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는 당내 중량감 있는 인사들을 일찌감치 지방선거 격전지에 투입시켰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홍 대표의 요청으로 6·13 지방선거 출마를 결심한 김문수 서울시장 후보와 이인제 충남지사 후보도 각각 친박계와 범친박계로 분류되지만, 만약 당선되더라도 중앙당 정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광역지자체장이라는 특성상 당권 경쟁에서 위협이 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말했다.
 
홍 대표가 이 전 총리에게 충남 지사 출마를 등 떠밀었던 사실 역시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이 전 총리는 3선 국회의원, 충남지사, 국무총리를 역임한 ‘거물’ 정치인이다. 홍 대표 입장에선 김문수·이인제 후보 등과 마찬가지로 당장 자신의 당권을 위협할 수 있는 이 전 총리의 원내 입성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이에 홍 대표는 이 전 총리의 재보궐 출마를 원하는 충청 지역 정가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 전 총리에게 공천을 주지 않으면서 그의 중앙 무대 복귀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했을 거라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 한국당의 한 중진 의원은 “홍 대표는 잠재적으로 차기 (대권) 경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들이지 않는다. 이완구 전 국무총리에게 공천을 안 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재보궐 불출마 선언...
굳이 필요성 느끼지 못했다?

 
결국 홍 대표로 인해 자신이 염두에 두고 있었던 ‘천안갑 재선거→당권→대권’ 플랜에 수정이 불가피해진 이 전 총리는 첫 과정을 과감히 생략하고 지선 이후 곧바로 당권을 찍은 뒤 곧바로 대권으로 직행하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 전 총리 입장에선 홍 대표의 이 같은 견제(?)를 무릅쓰고 위험 부담이 큰 재보궐 선거에 굳이 나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지선에서 한국당이 참패한다면 모든 책임 화살은 오롯이 홍 대표를 향할 것이다. 그 시점에 자신이 충청권 의원들의 추대를 받는 식으로 당 대표에 출마한다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은 재보궐에 출마해 당선되고 홍 대표는 스스로 공언한 광역단체 6곳을 수성하지 못했을 때가 최고의 시나리오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만약 한국당이 참패하더라도 자신 역시 재보궐 선거에 출마해 낙마한다면 이는 전대 출마에 명분이 약해질 뿐만 아니라 홍 대표에 날을 세울 동력도 잃고 마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치권은 이 전 총리가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책임론은 피해가면서 당내에서 어느 정도 역할은 할 수 있는 자리인 ‘충청지역 선대위원장’을 맡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를 통해 당내 기반을 닦아 놓고 지선 이후가 되면 본격적으로 당권 경쟁에 스퍼트를 올리려는 시나리오다. 실제로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 전 총리는 “당에서 요구를 하든 하지 않든, 후보자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지방 어디든 찾아가 힘을 실어줄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전 총리가 당권 도전에 성공하면 그는 곧바로 유력 대권 후보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 다음 행보는 자연스레 2022년 21대 대선이 될 전망이다. 충청 대망론의 중심에 섰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허망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봐야만 했던 충청권은 새로운 정치권 리더에 대한 갈망이 큰 상황이다.
 
이 전 총리는 이러한 기대심리에 대해서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이날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충청 대망론은 살아있다. 저를 포함해서 충청 대망론에 가 있는 분들 많이 있다. 그분들 돕든지 제가 직접 나서든지 불씨를 꺼뜨리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다만 앞서 언급한 이 전 총리의 플랜에는 한국당의 ‘지선 참패’라는 조건 변수가 따라붙는다고 정치권은 지적한다. 한국당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선전한다면 홍준표 대표의 리더십이 재평가될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되면 당 장악을 끝마친 홍 대표가 친홍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재신임을 받는 것을 막을 명분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세상사가 다 그렇지만, 정치도 결과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6곳 이상에서 이기면 홍준표 대표가 어려울 때 당을 위해 고생한 것이 조명받을 것이고, 완전히 지는 그림이 나오면 당을 분열시켰느니 인재 영입에 실패했느니 하는 책임론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플랜 B=‘포스트 JP’,
독자 세력화 염두

 
이에 정가에선 이 전 총리가 홍 대표의 재신임을 저지하지 못했을 경우엔 과거 김종필 총재와 마찬가지로 독자 세력화를 시도하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나온다. 과거 김종필 전 총재는 민주자유당을 탈당해 충청도를 기반으로 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김 전 총재가 창당한 자민련은 지난 1995년부터 약 11년간 정치무대에 존속했다. 처음 민자당을 탈당한 의원은 5명에 불과했지만 이듬해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자민련은 50석이나 차지하며 원내 3당 지위를 공고히 했다.
 
자민련은 정권 창출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7년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와 김종필 자민련 후보의 단일화를 이뤄냈다. 이른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일궈낸 자민련은 공동 여당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한편 이 전 총리의 재보선 불출마 선언 직후 자유한국당 충남도당에선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전 총리가 이번 선거에 출마해 충청권 보수세력 결집의 촉매제 역할을 해 줄 것이라 기대했는데 홍 대표의 사리사욕으로 인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앞서 한국당 천안을·병 당협위원장과 천안시의원 등은 지난달 중순 “한국당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려면 이 전 총리의 출마가 절실하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중앙당에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부가 천안갑에 최근 당협위원장으로 결정된 길환영 전 KBS 사장을 사실상 내정하고 급기야 이 전 총리가 불출마를 선언하자 불만이 한 번에 터져 나오는 것이다.
 
충남도당의 관계자는 “이 전 총리가 천안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천안을 휘젓고 다니면 침체한 보수세력을 결집하는 촉매제로, 더불어민주당으로 기울어진 선거판을 뒤바꾸는 데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이 전 총리가 불출마 선언을 한 만큼 새로운 선거전략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충남도당의 또 다른 관계자는 “충남도민 사이에서 도지사 시절 ‘한국의 중심 강한 충남’을 표방했던 이 전 총리에 대한 그리움이 많다”며 “이번에 선거에 출마했다면 충남은 물론 대전까지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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