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논현동 관세청 사거리에 위치한 두산빌딩. 두산가 ‘형제의 난’ 진원지인 두산산업개발이 입주해 있는 이 빌딩은 요즘 부쩍 출입자 단속이 심해졌다. 로비에서는 출입자들을 상대로 일일이 방문자의 신원과 방문 목적을 확인하고 들여보낸다. 업무로 찾아온 방문객들은 엄격한 출입자 통제로 시간이 지체되자 경비원들과 실랑이를 벌이는 경우가 자주 목격될 정도다. 박용오-용성 형제의 경영권 분쟁이 수면위로 떠오른 지난 7월 중순 이후 두산빌딩은 마치 국제공항의 출입국 심사대와 같은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두산빌딩이 외부 출입자에 대해 엄격히 통제하는 것과는 달리 두산그룹 오너 일가족들은 줄줄이 출국이 금지됐다.

이들이 출국금지된 배경은 두산가 ‘형제의 난’ 사건에서 핵뇌관인 비자금 문제의 ‘핵심’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두산 사건의 주역이 아닌 이들이 출국금지까지 당한 것은 검찰이 두산의 문제의 비자금 실체를 파악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어서 주목된다. 오너 일가가 출국금지되면서 박용오 전 회장이 ‘두산의 비자금 창구’라고 주장한 회사들이 주목받고 있다. 현재 검찰이 두산그룹의 비자금 창구로 추정하고 있는 곳은 넵스, 뉴트라팍, 동현엔지니어링, 일동여행사, 태맥 등 5개사. 흥미로운 점은 이들 회사가 이름이나 업종으로 볼 때에는 전혀 두산그룹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직간접적으로 모두 두산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넵스

현재 이 회사의 오너는 두산그룹 박용곤 명예회장의 막내동생인 박용욱 (주)이생 회장. 박 회장은 두산그룹의 3세지만 그동안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다. 취재 결과 그는 두산 오너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그룹의 경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아왔다는 것. 두산그룹 측에 따르면 그는 그동안 ‘개인사업’을 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박 회장은 그동안 개인사업을 해온 것은 맞지만, 사실상 두산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문제의 회사인 ‘넵스’는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회사로 창호공사업, 설비공사 등을 하는 주방가구 업체.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이 회사는 자본금 4억5,000만원을 들여 설립됐으며, 대표이사는 박용욱 회장으로 되어 있다. 박용욱씨는 원래 이생산업이라는 회사를 맡고 있었는데, 지난 98년 4월 넵스와 이생산업이 합병하면서 이 회사의 대표이사가 됐다. 박용오 전 회장측에 따르면 이 회사는 단순히 주방가구업체가 아니었다는 것. 명목상으로는 주방가구업체지만 사실상 두산그룹의 계열사와 독점 계약을 해왔고, 지난 5년 동안 비자금 200억원을 조성했다는 게 박용오 회장측의 주장이다.

뉴트라팍

이 회사는 현재 두산그룹의 자금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원래 이 회사는 미국 위스콘신주에 세워진 바이오 벤처회사. 그동안 이 회사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었으나, 박용성 회장의 장남인 박진원 상무가 이 법인의 등기이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박 전 회장측의 주장에 따르면 두산그룹은 이 벤처회사에 연구비를 투자한다는 명목으로 약 800억원이 자금을 해외로 송금했지만 사실상 이 돈은 두산의 비자금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태맥·동현·일동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한 태맥은 음식점업 및 유통전문 판매업체. 이 회사의 주요 주주구성을 보면 두산오너 일가와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대표이사를 비롯한 주요 경영인들은 두산의 ‘오비 멤버’ 들이다. 이 회사는 지난 96년 자본금 12억원을 들여 세워졌는데,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이모씨는 전 동양맥주 사장 출신으로, 이 회사가 처음 설립됐던 지난 96년 두산그룹에서 퇴사했다. 박 전 회장의 진정서에 언급된 또 다른 회사인 ‘동현엔지니어링’은 소독업, 주차장 용역관리, 용역 경비업 등을 하는 청소업체. 이 회사는 지난 86년 자본금 5,000만원으로 설립됐는데, 대표이사가 수차례 바뀌었다. 지난해 임시주총에서 대표이사가 이모씨에서 김모씨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 회사의 대표이사인 이모씨는 두산산업개발 부사장, 김모씨는 (주)두산기업 부사장을 지냈다.

‘일동여행사’는 중구 태평로 1가와 경남 창원에 사무실을 하나씩 갖고 있는 여행사다. 지난 94년 강모씨가 이 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했는데, 그는 박용만 두산그룹 부회장의 손윗 처남으로 알려져 있다. 박용오 전 회장의 주장에 따르면 ‘태맥’은 박용성 회장 부자의 개인 경비 조달을 위한 비자금 창구로 쓰였고, ‘동현엔지니어링’은 두산그룹 건물 관리를 맡아 과다 비용을 청구하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축적했다는 것이다. ‘일동여행사’는 그동안 두산그룹 직원의 출장과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방법으로 비자금을 만들었다는 것. 이들 5개 회사는 물론 두산그룹의 자회사나 계열사로 등록돼 있지 않다. 하지만 검찰이 이 회사 중 일부에 대해 혐의 사실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의 주장처럼 이들 5개사와 두산그룹 오너 일가족의 비자금이 연관있는 것으로 밝혀질 경우 그룹 전체가 휘청거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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