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문종 때 중앙 문관의 정원이 532인이고, 그 이속의 정원은 1,165인이었는데, 무신의 난 당시 학살된 문신은 100명 정도였다. 
이렇게 반란에 성공한 정중부는 난리가 난 것을 알아차리고 줄행랑을 놓은 김돈중을 잡아 참수하고, 그해 9월 2일 의종을 거제현으로, 태자를 진도현으로 추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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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의 아우 익양공(翼陽公) 호(晧)는 반란세력에 의해 옹립되어 1170년 9월에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이 사람이 바로 허수아비 왕인 고려 제 19대 명종(明宗)이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명종은 즉위하자마자 정중부, 이의방, 이고를 벽상공신(壁上功臣, 정일품)에 봉하고 그들의 화상을 그려 전각에 붙였다. 
이리하여 고려는 문신의 귀족정치가 붕괴되고 ‘무신정권’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신정권은 피가 피를 부르는 폭압의 시대로 바뀌어 고려 쇠망의 원인이 되었다. 
1170년 이후 계속된 무신정권은 1270년 마지막 집권자인 임유무(林惟茂)가 살해당하기까지 향후 100년간 지속된다. 무신들의 권력 변화 계보는 이고(1년)→이의방(3년)→정중부(5년)→경대승(4년)→이의민(13년)→최충헌(23년)→최우(30년)→최항(8년)→최의(1년)→김준(8년)→임유무(1년) 순으로 이어진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고 했던가. ‘달도 차면 기울고(月滿則虧 월만즉휴) 물도 차면 넘친다(水滿則溢 수만즉일)’라는 말이 있듯이 권력을 틀어쥔 어제의 쿠데타 동지들 사이에도 분열이 생겼다. 
이고가 이의방을 몰아내려 하자 이의방은 이를 눈치 채고 거사 당일 궁문 밖에서  이고를 철퇴로 때려 죽였다. 이의방이 권력을 독점하려고 1174년 자기 딸(사평왕후)을 태자비로 들이자, 정중부는 아들 정균(鄭筠)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러 서경에 갔다가 패하고 돌아오는 이의방을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
이렇게 하여 온건 세력을 이끌고 있던 정중부가 시중(侍中) 벼슬에 올라 최고 권력을 차지하였으며, 그의 아들 정균과 수하인 이광정, 정종실, 송유인 등이 권력을 농단하고 남용하였다. 
이에 정중부 세력의 전횡을 탐탁지 않게 여긴 26세의 청년장수 경대승(慶大升)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 일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경대승은 도방(都房)이라는 사병 집단을 두고 권력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정중부의 귀신을 보았다’고 헛소리를 하며 병상에 누운 뒤 집권 4년 만에 30세로 병사(病死)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명종은 경대승을 두려워하여 고향인 경주로 달아나 있던 이의민(李義旼)을 판병부사(判兵部事, 상서병부의 으뜸 벼슬)로 조정에 다시 불러들였다. 이의민은 새로운 무신 권력자가 되어 13년 동안이나 권력을 지속하였다. 
1196년 4월. 최충헌(崔忠獻)이 동생 최충수(崔忠粹)와 모의하여 미타산(彌陀山) 별장에서 이의민을 참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1197년 9월. 최충헌은 27년 동안의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해온 66세의 연로한 명종을 내쫓고 그의 아우 평량공(平凉公) 왕민(王旼)을 왕으로 세웠다. 이 사람이 고려 제 20대  신종(神宗)이다. 이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신종이 즉위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최충헌은 ‘봉사(封事)10조’를 신종에게 올려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왕을 마음대로 폐위하고 옹립하였으며, 사원세력을 제거하고 농민과 노비의 난을 진압하여 정권의 안정을 가져와 최씨 무신정권은 62년 동안 이어지게 된다.
고려가 국운을 융성시켜 동북아 중심국으로 나갈 수 있었던 1200년을 전후한 전환기는 무신정권의 내부 파쟁(派爭, 파벌끼리의 다툼)에 매몰되어 오히려 국력이 약화되었고, 그 결과는 이 전환기를 틈타 일어난 몽골에게 예속되어 140여 년간 온갖 수난과 수탈을 당하는 어두운 역사로 귀결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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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13세기에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북방 몽골초원에서 칭기즈칸(成吉思汗)이 등장하면서 고려는 미증유의 국난에 처하게 되었다. 1218년(고종 5년) 강동성(江東城, 평양동쪽 강동군에 있던 성) 전투(고려·몽골·동진東晋의 연합군이 강동성에 침입한 거란군을 섬멸한 전투)를 계기로 고려와 몽골 간의 첫 접촉이 이뤄진 이래 1356년(공민왕 5년) 고려의 반원운동이 성공할 때까지 약 140년간 고려 역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게 바로 몽골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은 중앙아시아 북방 초원지대에 살던 유목민으로 금(金)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206년에 테무친이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칭기즈칸으로 추대된 뒤, 그는 기병 20만을 거느리고 사방으로 정복사업에 나서 영토를 확대하였다. 서쪽으로 서하(西夏.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국)를 치고 중앙아시아·유럽의 일부까지 석권하고, 남으로 금나라 북쪽의 여러 성을 점령하였다. 
이때부터 고려와 원나라 간에는 격동의 역사가 시작된다. 
고종(高宗)은 1212년(강종 1년) 태자에 책봉되고, 이듬해 강종(康宗)의 뒤를 이어 고려 제 23대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22세였다. 
고려의 왕과 중신들은 당시의 국제 정세에 어두웠으며 세계제국을 이룬 몽골에 대처할 수 있는 안목도, 의지도, 능력도 갖지 못했다. 중신들은 패권국가 몽골을 대국으로 인정하고 사대하여 실리를 취할 것인가, 그들을 오랑캐로 간주하고 자주하여 명분을 지킬 것인가를 놓고 갈팡질팡하였다.
칭기즈칸은 서역 정벌을 마치고 서하 지역을 정복하려다가 1227년에 죽고, 그의 셋째 아들 태종 오고타이가 즉위하여 금나라를 정복했다(1234년). 그리고 살례탑(撒禮塔)에게 군대를 주어 고려를 침략하도록 했다.
1231년(고종18). 살례탑이 지휘하는 몽골군은 6년 전(1225, 고종13)에 몽골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귀국 도중 도적에게 피살된 것을 구실로 침략했다(몽골의 1차 침략). 
고려는 큰 대가를 치르고 몽골과 겨우 강화를 맺었지만, 그 후 몽골이 또다시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1232년(고종19) 봄. 집정자 최이(崔怡, 초명은 최우)가 재추회의를 소집하여 강화 천도를 논의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 중서문하성의 종2품) 유승단(兪升旦)이 반대했다.
“작은 나라가 예의로써 큰 나라를 섬기고 신의로써 그들과 교류한다면, 저들이 무슨 명분으로 우리를 괴롭히겠습니까? 성곽을 포기하고 종묘와 사직을 버리고 섬으로 도망하여 구차하게 세월만 보낸다면, 변경의 백성들과 장정들은 적의 병장기에 쓰러지게 되고 노약자는 노예가 되니, 나라를 위하는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중신들은 최이가 무서워 유승단의 의견에 동조하지 못했다. 
이때, 회의장 밖에 있던 야별초 지유(指諭, 중간급 지휘관) 김세충(金世沖)이 회의장 문을 박차고 들어와 최이에게 강화 천도의 부당함을 역설했다.
“개경은 태조 왕건대왕 때부터 지켜 내려온 지 무려 3백 년이 넘었습니다. 성이 견고하고 군사와 양식이 풍족하니 진실로 힘을 합하면 사직을 지켜낼 수 있는데, 이곳을 버리고 장차 어디로 도읍하겠다는 것입니까?”
1232년 6월 16일. 최이는 천도론에 반대하는 유승단과 김세충을 처형하고 정권 유지와 장기 항전을 위해서 고종과 함께 강화도로 천도하였다. 천도 당시의 개경 인구는 약 10만 명이었다. 
고종은 포고령을 내리고, 이어 각 도에도 영을 내렸다.
각 기관을 강화로 옮기고 백성들의 이거(移居, 이주)를 시행토록 하라. 이거를 늦추는 자는 군법으로 처단할 것이다.
백성들에게 산성이나 해도(海島)로 피난하게 하라.
강화 천도 직후 몽골은 고려 정부의 개경 환도를 요구하며 2차 침략을 개시한 이래 30년 동안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했다. 
왕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만 강화도로 피난하는 천도의 결행은 일반 민중에 대한 보호책은 전혀 강구되지 않은 무책임한 행위였다. 그 결과 본토는 초토화되었고 산하는 핏빛으로 물들어 의지할 곳 없는 민초들만 외세의 말발굽 아래 어육(魚肉)이 되었다. 
몽골과 싸운 30년간의 전쟁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고통을 겪은 전란의 기간이었다. 《고려사》 고종 41년(1254)의 기록은 전쟁의 참혹함을 잘 보여준다. 
1252년 몽골의 제6차 침입을 받았을 때 몽골병사에게 사로잡힌 남녀가 20만 6,800여 명이요, 살육된 자는 적시여산(積屍如山)을 이뤘으며, 삼천리강토가 핏빛으로 물들고, 지나가는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최충헌으로부터 최우·최항·최의로 이어지는 동안 최씨 무신정권은 7차에 걸쳐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신망을 잃고 지도력이 약화되었다. 이후 1257년에 몽골군이 제7차 침입을 감행해 오고, 이듬해 유경(柳璥), 김인준(金仁俊) 등에 의해 최의(崔)가 피살됨으로써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고종이 권력을 되찾았다. 
1259년(고종 46). 고종의 태자(뒤의 원종)가 입조(入朝)함으로써 원나라와 강화가 성립되어 30년 동안 지속되었던 여몽전쟁은 완전히 종결되었다. 당시 원나라 황제 헌종(憲宗, 몽케 칸)이 남송 정복 과정에서 죽자, 둘째인 쿠빌라이(뒤의 세조)와 막내인 에릭부케가 4년간의 왕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고려 태자는 쿠빌라이를 선택하여 그가 머무는 남쪽 양양(襄陽) 근처로 내려가 만났다. 
쿠빌라이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고려 태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먼 나라로 일찍이 당태종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항복시키지 못한 고구려의 후예인데, 이제 태자가 직접 찾아와서 나를 따르니 이는 하늘의 뜻이로다. 
쿠빌라이는 끈질기게 항전한 고려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강국으로 인식하였으며 고려에 우호적이었다. 몽골은 이때까지 정복한 지역을 모두 자기 영토로 편입시켰던 것과 비교할 때 실로 파격적인 강화조건을 수락했다.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과 고려를 원의 직할령으로 복속하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나라로 인정하는 ‘세조구제(世祖舊制)’가 그것이다. 
고려가 몽골제국 체제 하에서 이러한 독립적 지위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초적(草賊) 출신 병사들의 대활약, 노군·잡류들이 끝내 지킨 충주성 전투, 부곡민 스스로 단결하여 침략군 총사령관을 죽인 처인성 전투 등 고려 백성들의 장기간에 걸친 피어린 항쟁의 결과였다.
이 ‘세조구제’는 향후 양국 간 국가관계는 물론, 교류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쳐 원의 간섭으로 고려의 독립이 위협받을 때마다 이를 방어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이처럼 23대 고종은 최씨 무신정권을 끝내고 왕정을 회복했으나 동시에 고려를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시켰다. 그 후 24대 원종(元宗)은 원나라 황제의 딸들을 맞아들여 고려가 원나라의 사위나라로 되었고, 원나라를 모시기 시작한 첫 번째 임금이라 시호를 원종이라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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