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부산상호신용금고 오너인 박 전회장은 금호그룹 창업자인 박인천 전회장의 장조카이자 얼마전 타계한 박성용 명예회장의 사촌형이다. 그는 금호그룹 창업 당시 박인천 회장과 함께 그룹 모기업인 광주여객을 설립, 박인천 전회장이 사장을 맡고 그는 전무를 맡아 사실상 경영을 주도했다. 특히 그는 삼양타이어 회장직에서 물러난 직후 도가산업이라는 회사를 세워 독자행보를 걷는 한편 금호그룹을 상대로 삼양타이어 관련 법정투쟁에 나서기도 했다.하지만 그는 세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밀한 행보를 거듭해왔다. 그런 그가 최근 퇴진 과정에서 있었던 비화를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 1일 광화문 K빌딩 사무실에서 가진 <일요서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1981년 당시 신군부의 서슬이 시퍼럴 때 DJ에게 후원금을 준 것이 빌미가 돼 그룹에서 퇴진을 종용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5·18 민주화운동 직후로 정국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당시까지만해도 목포상고 출신들은 ‘DJ맨’으로 분류돼 군사정권으로부터 무수한 압박을 받았다. 목포상고 출신인 자신도 비슷한 케이스라는 것이다. 그는 “목포상고 1년 후배인 DJ에게 후원금을 전달한 것이 군사정권에 알려지면서 어려움이 있었다. 그룹에서 적지 않은 퇴진 압박을 가했다”면서 “결국 회사의 모든 지분을 정리하고 회사를 나왔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이 일로 덕을 보려고 했다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언제든지 DJ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면서 “대통령 재임 시절 한 번도 DJ를 찾은 적이 없다. 퇴임 이후 한 번 정도 본 게 전부”라고 덧붙였다. 그는 그러나 더 이상의 언급을 회피했다.

사촌동생인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을 비롯한 사촌들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일을 꺼내봤자 무엇하겠느냐. 요즘 금호그룹이 잘하고 있다. 박삼구 회장도 열심히 하는 것 같다”면서 “일각에서는 삼양타이어 회장 퇴진이 경영권 분쟁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쳐지고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말속에는 아직도 삼양타이어 회장직에서 물러난 것과 관련해 밝히지 못할 아쉬움이 많음을 느끼게 했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금호그룹의 경영참여 의사도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헌 물은 새 물에 밀리는 법이다. 이미 나이가 많이 먹었고, 박성용 회장도 잘하고 있다”면서 “그룹 경영에 참여할 의사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삼양타이어 회장직을 그만둔 이유는 무엇인가. ▲목포상고 1년 후배인 DJ를 후원한 것이 빌미가 됐다. 이같은 사실이 군사정권에 알려지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룹에서도 퇴진 압박을 가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회사를 나왔다.

- 지분 정리는 어떻게 했나. ▲삼양타이어 지분을 모두 정리하는 조건으로 그룹에서 25억원을 받았다. 이 돈으로 부산과, 대전, 광주에 있는 상호신용금고를 인수했다. 안성에도 도가산업을 만들어 함께 사표를 낸 직원들이 일할 수 있도록 했다.

- 퇴진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해줄 수 있나. ▲과거사일 뿐이다. 더 이상 얘기하는 것은 곤란하다. 이해해 달라.

- 이유는. ▲사촌동생인 박삼구 회장에게 부담을 주기는 싫다. 다 지나간 일이다. 박삼구 회장 도 요즘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와서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 사건 이후 DJ를 별도로 만난 적은 있나. ▲그렇지 않다. 이 일로 덕 보려고 했다면 언제든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순수한 의미의 후원금이었을 뿐이다. 때문에 대통령 재임 시절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다. 퇴임 이후 한 번 정도 본 게 전부다.

- 박성용 명예회장이 별세하면서 그룹 경영권에 대한 관심이 높다. ▲관심 없다.

- 그룹 경영에 참여할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사실이 아니다.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부산상호저축은행 지분도 이미 같이 고생한 아들과 직원들에게 넘겼다. 요즘은 1주일에 한 번씩 부산상호저축은행과 부산제2저축은행을 들르고 있다.

# “나를 키워준 부산을 위해 복지재단 건립”

박 전회장은 요즘 서울에 머물며 일주일에 한번씩 부산을 오가고 있다. 최근에는 부산상호저축은행 지분 대부분을 넘겨줬다. 자신이 사용할 지분 10%를 제외한 90%를 함께 고생한 아들(45%)과 직원들(45%)에게 양도했다. 지분 10%를 남겨둔 것은 복지재단을 건립하기 위해서란다. 그는 “부산에서 고생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부산이 저를 키웠습니다. 이런 부산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 복지 재단을 건립하기로 했습니다.”복지재단 건립 준비는 현재 상당 부분 마무리된 상태. 이미 법인 등록까지 마쳤다. 오는 9월이면 복지재단을 공식 오픈할 수 있을 거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외국의 경우 기부 문화가 잘 발달돼 있습니다. 이는 벌어들인 만큼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이라면서 “향후에는 복지 재단 이사장으로 있으면서 노년을 보낼 예정”이라고 말했다.

# “제2의 인생 산다는 생각으로 죽어라 뛰었다”- 그룹서 ‘팽’ 당한 금호가 장손 재기 비밀 2

박 전회장은 기자에게 삼양타이어를 그만두고, 부산상호저축은행(전 부산상호신용금고)을 키우기까지의 과정도 상세하게 설명했다. 당시 박 전회장이 삼양타이어 지분을 모두 청산하는 조건으로 그룹에서 받은 돈은 25억원. 그러나 식구는 박 회장 한명만이 아니었다. 박 회장이 회사를 그만두자 80여명의 직원이 박 회장을 따랐다. 그는 “나 혼자 살기에는 25억원이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믿고 사표를 낸 80명의 직원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면서 “ 때문에 이들이 생활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드는데 모든 돈을 쏟아 부었다”고 설명했다. 박 회장은 우선 부산과 대전, 광주에 있는 상호신용금고를 차례로 인수한 뒤, 직원들을 이곳에서 일하게 했다. 안성에 도가산업을 차려 30여명의 직원들이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회사 사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6년여가 지난 87년 빛이 100억원 가까이 불어났다.

박 회장은 직원들의 월급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회사를 매각했다. 부산의 상호신용금고도 매각을 시도했지만 좀처럼 임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박 회장은 20여명의 직원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곳에서 박 전회장은 ‘제2의 인생’을 살았다. 당시 부산상호신용금고의 매출은 28개 상호신용금고 중 27위. 예금액도 123억원 정도가 전부였다. 무엇보다 공신력을 확보하는 게 시급했다. 이를 위해 박 전회장은 직원 30명의 임무를 분담했다. 10명은 평상시대로 금고일을 맡게 했다. 나머지 10명은 돈을 빌려주면 벌어서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이를 위해 이들은 한 명당 10명씩을 분담해 새벽 기상시간까지 체크했다. 나머지 10명은 1급 건설회사의 어음을 구입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현금과 다름없는 금고의 보증수표를 발행해 이들 건설업체의 하청업체와 어음을 교환한 것. 이렇게 확보한 어음은 일본계 은행인 야마구치은행에 제공했다. 그는 “6개월여가 지날 때 쯤 은행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원하는 게 뭐냐’는 거였다”면서 “‘원하는 것은 없다. 단지 공신력을 쌓기 위한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자 아무런 조건 없이 20억원을 선뜻 내줬다”고 회고했다. 야마구치은행의 대출은 부산상호신용금고에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를 낳았다. 외국계 은행에 소문이 퍼지면서 도쿄은행, 도이치은행 등에서도 차례로 20억원을 대출해 줬다. 20억원 상당의 사옥을 담보로 국내 은행에서 대출받은 금액이 5억원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이익을 챙긴 셈이다. 이후 부산상호신용금고는 차분한 성장을 거듭, 자본금만 1,000억원에 달하는 부산 제1의 상호신용금고로 등극했다. 얼마전에는 부산상호저축은행으로 상호를 변경, 코스닥에도 등록했다.지난 99년 인수한 부산제2상호저축은행도 이같은 방법으로 키웠다. 예금보험공사로부터 인수할 당시 이 은행은 부실 투성이였다. 고객으로부터 받지 못한 돈만 171억원에 달했다. 박 전회장은 돈을 받기 위해 채무가 있는 사람들을 일일이 만났다. 이 과정에서 돈을 갚을 능력이 되는 사람들에게는 추가로 대출을 해줬다. 이렇게 받은 돈이 100억원에 달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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