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고려와 원나라 양국의 통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신정권을 청산하고 왕정복고를 이뤄내려는 고려 왕실의 입장과 남송(南宋)과 고려의 연합을 방지하고 고려를 일본정벌의 선봉에 세우고자 하는 원 황실의 입장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1270년 5월. 원나라에서 귀국한 원종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의 환도(還都)를 명하였다. 이는 고려가 몽골에 복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해 2월 등창으로 죽은 아버지 임연(林衍)의 지위를 승계한 임유무(林惟茂)는 원종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원종은 삼별초 송송례(宋松禮), 홍규(洪奎)를 회유하여 임유무를 암살하게 하였다. 
마지막 무신집권자인 임유무의 죽음으로 1170년 이후 100년간 왕권보다도 큰 권력을 행사하던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왕정(王政)이 복고(復古)되었다. 이로서 40년 가까이 머무르던 강화도 궁궐시대도 끝이 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고려는 원나라의 압박 아래 놓이게 되고 말았다. 
한편, 1260년 몽골제국의 제5대 대칸(大汗)으로 즉위한 칭기즈칸의 손자 세조 쿠빌라이(忽必烈 홀필렬)는 도읍을 연경(燕京, 북경)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1271년 나라이름을 ‘대원’(大元)으로 바꾸었다. 
원나라는 불세출의 군주 세조시대에 정치·경제·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원나라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한족 이외의 민족이 통치한 통일국가로, 모스크바를 포함한 동유럽 지역부터 티베트와 남송을 멸망시키고 전 중국을 통일하여 전무후무한 세계제국을 이루었다. 
개경으로 환도한 후, 원종이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裵仲孫),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다. 
1273년 4월. 여몽 연합군은 160척의 전함에 1만여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제주도를 공격하여 삼별초를 토벌하였다. 고려 무인의 마지막 대몽항전인 삼별초의 저항이 끝나자 고려 조정은 거의 원에 복속되었다. 
고려가 원나라에 굴복한 뒤 최초로 받은 압력은 고려군이 일본정벌에 동원된 일이었다. 쿠빌라이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복종할 것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몽골사신의 목을 베어 버렸다. 
1274년. 격노한 쿠빌라이는 여몽 연합군을 구성(고려는 군량을 공급하고 함선을 건조하고 직접 군사를 동원했음), 일본 정벌에 나섰다. 여몽 연합함대는 일본 규슈섬 남쪽으로 상륙을 시도했으나 태풍이 불어 좌절됐다.
1281년 8월. 쿠빌라이는 다시 14만 명의 군대를 소집하고 4,400척의 배를 건조해 2차 일본 정벌을 명했다. 그런데 단 하룻밤 사이에 많은 배와 병사들이 바람(태풍)으로 인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일본인들은 이를 두고 신이 자신들을 구해준 바람이라 하여 신풍(神風)이라고 불렀다.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은 원나라 몰락의 시초가 됐으며 고려의 피해도 막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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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2년(원종13) 2월 어느 날이었다. 
개경에는 하루 종일 해동(解凍)을 알리는 봄비가 진눈깨비와 뒤섞여 추적거렸고, 거센 동풍이 불어 빗줄기를 몰아붙이니 앞뒤를 분간할 수 없었다. 난데없이 찾아온 봄비에 흠뻑 젖은 개경의 거리와 장엄한 만월대(滿月臺), 우뚝 솟은 송악산(松岳山)도 을씨년스러운 겨울 살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연경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심(王諶, 나중의 충렬왕)과 수행관원들의 어깨는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긴 버드나무 가지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빗물에 절어 후줄근해진 도포자락이 진창이 된 땅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태조 왕건의 창업 이래 270년을 이어온 고려 사직이 몽골의 말발굽에 짓밟힌 것처럼. 그러나 이날 원나라 단사관(斷事官) 불화(不花)와 마강(馬絳)은 마치 자신들이 고려의 세자가 된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고려의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은 본궐(本闕, 만월대)을 나와 개경의 서북쪽에 위치한 금교역(金郊驛)까지 세자 일행을 마중 나갔으나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세자 왕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당황하여 세자 행렬을 앞뒤로 뒤졌으나 왕심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본궐로 철수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때 환영 대열 속에서 한 백성의 외침이 주위를 울렸다.
“세자가 안 보인다!”
“뭐라고? 세자가 안 보인다고?”
“그럴 리가 있나? 주인공이 없다니!”
“그럼,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멍청이가 있는가!”
환영식에 도열한 백성들은 놀란 토끼눈이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되물었다. 얼마 뒤, 왕심이 탄 백마가 눈에 띄었다. 그는 머리의 주위를 깎고 머리카락을 정상만 남게 땋아 묶고 늘인 변발(辯髮) 머리에 호복(胡服)을 입고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가!”
“고려의 세자가 몽골 사람 행색을 하다니!”
“나라에 망조가 들었어!”
“허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사위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그래!”
“이런 오뉴월에 고뿔 앓다가 땀도 못 내고 죽을 놈을 봤나. 들으면 어때?”
“그래도 말조심 해야지.”
환영식장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던 백성들은 이내 허탈한 헛웃음을 짓기 시작하였다. 좌중은 웅성거리기 시작하더니 환영식장은 금세 성토장으로 돌변해버렸다. 어떤 이는 탄식하고 어떤 이는 땅을 치고 어떤 이는 대성통곡했다. 도열한 문무 관리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오합지졸처럼 우왕좌왕,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들이 죄인이라도 된 듯 풀죽은 모습이 역력했다.
왕심도 속으로 백성들과 함께 통곡했다. 약소국가 왕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날 왕심을 맞이하는 동풍세우(東風細雨)는 의지할 곳 없는 민초들의 가슴에 광풍대우(狂風大雨)로 남아 이후 두고두고 부마국(駙馬國) 고려의 백성들을 울렸다.
원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32살 되던 해(1267년)에 태자에 책봉된 왕심. 그가 장년의 37살이 되던 해에 원나라에 가서 세조(쿠빌라이)에게 혼인 허락을 받고 귀국하는 길이었다. 세조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손자로, 그의 재위기간(1260~1294)은 원나라 최고의 강성기였다.
왕심은 귀국하기 전에 원나라 세조에게 이렇게 충성맹세를 했다.
신의 부자가 대를 이어 조근(朝覲, 신하가 왕을 뵘)하고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므로 고려의 인민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이 매년 입조(入朝)할 때마다 은덕을 입었으니 신의 충성이 더욱 간절하여 보답할 도리만 궁리하고 있습니다. 생각건대 일본은 아직도 황제의 감화를 입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신에게 이 일을 맡겨주신다면 신은 온 힘을 다하여 정벌사업을 조금이라도 방조(傍助, 곁에서 도와줌)하겠습니다. 
1272년(원종13). 왕심은 다시 원나라에 입조하여 연경에 머물렀다. 2년 후인 1274년(원종15) 음력 5월 병술일. 원나라 연경 황궁에서 화려하고 성대한 혼례식이 거행되었다. 신랑은 39세의 왕심이고, 신부는 신랑보다 23세 어린 16세의 원나라 황제(세조 쿠빌라이)의 딸 홀도로게리미실(忽都魯揭里迷失, 제국대장공주, 세조의 두 번째 황후의 딸)이었다.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세자빈이 된 것이다. 세자 왕심은 이때 정화궁주(貞和宮主, 종실 시안공인始安公絪의 딸)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1남 2녀가 있었다. 
황궁 안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세계 각국의 사절, 볼모로 잡혀 와 있는 각국의 왕자·공주 등도 초청되어 왔다. 연회장인 무덕전(武德殿) 광장은 초여름 녹음으로 뒤덮여 장관을 이룬 가운데 비단 휘장을 사면으로 둘러쳤고, 북쪽에 높은 단을 세워놓고 가운데에 큰 촛불을 켜놓았다. 천장으로부터 사면 벽에 줄마다 달아놓은 오색등불은 매우 휘황찬란하여 사람의 얼굴에까지 오색이 아롱졌다. 
뜰 아래에서 몽골의 전통 음악소리가 구성지게 울려 퍼지고, 늙은 신랑이 고려 대신들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섰다. 신랑은 황제 앞에 나아가 국궁(鞠躬, 존경의 뜻으로 몸을 굽혀 절함) 자세로 섰다. 뒤이어 궁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앳된 신부가 족두리 쓰고 연지 곤지 찍고 들어섰다.
티베트 라마승이 혼례를 집전했다.
“상제시여! 양국에게 태평성대를, 새로운 부부에게 만복을 누리도록 하시옵소서.”
스님은 신랑과 신부를 인도하여 황제 내외의 단 앞에 세웠고 신랑 신부는 황제 내외 앞에 나아가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올렸다. 이어 여러 황족에게 차례로 절을 올렸다. 식이 끝나자 황궁에서는 소를 잡고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밤늦게까지 연회가 계속되었는데 원종은 고려의 악관(樂官)으로 하여금 원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는 곡조를 연주하게 했다. 연회가 끝나고 왕심과 공주가 융복궁으로 가자 태후가 다시 연회를 베풀어 주었고 밤이 깊어서야 파연(罷宴)했다. 이렇게 혼인 잔치는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으며, 왕심은 원의 부마가 되었다. 고려 황실과 원나라 황실이 혼인을 맺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혼례를 치른 두 달 후인 1274년 6월. 원종이 죽자 세자 왕심은 8월에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고려 제 25대 충렬왕(忠烈王)이다. 충렬왕은 원종의 맏아들로서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 소생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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