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그해 10월. 연경에 홀로 남아있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장목황후)가 남편을 찾아 고려로 왔다. 충렬왕은 멀리 국경 부근인 서북면 평원군까지 가서 공주를 영접하였다. 왕족들과 평장사 유천우, 지추밀원사 장일, 지주사 이분희, 승선 최문본, 박항, 상장군 박성대 등이 호종(扈從)했다. 충렬왕은 자신의 부인이지만 원나라 공주를 영접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함과 긴장감을 느꼈다. 
공주의 일행이 들어서자 충렬왕은 공주에게 다가가 몽골식으로 손을 잡고 읍했다.
“공주, 그동안 무척 보고 싶었소이다.”
“전하, 오랫동안 뵙지 못해 죄송하나이다.”
“굽이 흐르는 고려 산천의 경관이 어떠하오?”
“산봉우리 한가로운 구름 일고 물 위엔 갈매기 나는 산천경개가 소첩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나이다.”
“인간사가 변한들 산천은 변치 않듯이 과인은 공주를 영원히 지켜줄 것이오.”
“고맙사옵니다. 전하.”
여러 달 만에 재회한 부부는 깊은 정을 나누며 다소 들뜬 마음으로 개경에 입성했다. 공주를 보려고 개경의 백성들이 국청사(國淸寺) 앞까지 나와 길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었다. 오랜 기간 몽골과의 전쟁에 지친 백성들은 두 손을 들어 공주를 환영하며 소리쳤다.
“백년 난리 후에 다시 태평시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모든 신하들에게 변발을 강권했었다. 
“과인이 공주를 맞이하러 가는데 신들이 아직 개체(開剃, 몽골식으로 머리를 깎는 것)하지 않았으니 어찌된 일인가?”
지주사(知奏事, 왕명의 출납을 맡은 승지방承旨房의 정3품) 이분희(李汾禧)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신들이 개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여러 사람들의 예(例)를 기다릴 뿐이옵니다.”
그러나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추밀원의 종2품) 송송례(宋松禮)가 한족(漢族)의 예를 들어 반대했다.
“원나라 조정은 변발령을 내려 한족에게 변발을 강요하였으나 머리를 땋아 올려 관(冠)을 쓰는 것을 의관의 풍속으로 여긴 한족은 맹렬한 반발과 저항을 했사옵니다. 하물며 우리 고려가 한족도 마다하는 몽골의 풍습을 따를 필요가 있겠사옵니까?”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추밀원의 정3품) 기온(奇蘊)은 한 발 더 나아가 반대 대열에 동참했다.
“변발은 단순한 두발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고려의 민족혼과 관련되어 있사옵니다. 변발을 하면 고려의 혼이 죽고 말 것입니다.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러자 충렬왕은 큰 소리로 역정을 냈다.
“대신들은 용천역에서 머물게 하고 대장군 박구(朴球)를 위시한 머리를 깎은 신료들만 과인을 수행하도록 하라.”
결국 제국대장공주의 귀국 환영식장에는 변발을 한 자, 고려의 전통 의관을 정제한 자들로 뒤섞여 있었다. 이때까지는 원의 부마국이 된 고려의 위상에 대한 왕과 신하들의 입장이 명확히 정리되지 못한 탓일 것이다.
마침내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가 개경에 이르러 죽판궁(竹坂宮)에 들었다. 이보다 앞서 평장사(平章事, 중서문하성의 정2품) 유천우(兪千遇)가 지추밀원사 장일(張鎰)에게 말했다. 
“금상께서 만일 호복을 입고 입성한다면 나라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길 것이 틀림없는데 걱정이 태산 같소이다.”
이어 유천우는 성품이 강직한 승선(承宣, 밀직사의 정3품) 최문본(崔文本)과 박항(朴恒)에게 지시했다.
“금상께서 예복을 입고 입성하실 수 있도록 청하도록 하시오.”
그러나 충렬왕은 승선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 재상과 관원들이 국청사 문 앞에서 영접하였는데, 충렬왕은 홀치(忽赤, 왕궁 숙위 관리) 강윤소(康允紹) 등에게 하명했다.
“예복을 입은 자들은 말을 타고 회초리로 쳐서 모두 환영식장에서 쫓아내거라.”
왕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랑장(中郞將, 정5품의 무관) 간유지(簡有之)가 말을 달리면서 회초리로 예복을 입은 대신들을 가차없이 후려쳤다.
“물러서라! 대원제국의 공주께서 오시는데 개체하지 않은 자들이 감히 어디라고 면전에서 어슬렁거리는가!”
충렬왕은 제국대장공주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어 고육지책을 쓴 것이다. 이후 충렬왕은 궁궐 밖으로 행차할 때마다 공주와 함께 갔다. 이는 충렬왕이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공주는 지배국의 공주 신분을 앞세워 국왕보다 더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심지어는 15년간 정실부인 역할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중전 자리를 빼앗긴 정화궁주(貞和宮主)를 감금하여 충렬왕을 만나지 못하게까지 했다. 공주의 위상에 압도당한 충렬왕은 공주가 동침을 요구하면 이에 충실히 응해야 했으며 간혹 욕설과 함께 지팡이로 두들겨 맞기도 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성격이 엄격하고 괴팍하여 좌우에서 모시는 사람들에게 과오가 있으면 털끝만큼도 용서하지 않았다. 
황제국가 고려의 모습은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점점 변해갔다. 급기야 충렬왕 때에 원나라 황제는 교지를 내려 내정간섭을 강요했다.
고려가 원나라와 같이 황제국 수준의 관제와 칭호를 사용하여 분수에 넘치니 이를 고치기 바란다.
이 때문에 충렬왕은 즉위한 이듬해에 관제를 개편했다.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을 합쳐 첨의부(僉議部)로, 추밀원은 밀직사(密直司)로, 어사대는 감찰사(監察司)로, 육부는 전리사(典理司)·군부사(軍簿司)·판도사(版圖司)·전법사(典法司)로 하였다. 그리고 조(祖)·종(宗) 대신에 왕을 칭하고 충성을 뜻하는 ‘충(忠)’자를 붙이게 되었으며, 선지(宣旨, 임금의 명을 널리 선포함)는 왕지(王旨)로, 짐(朕)은 고(孤)로, 사(赦)는 유(宥)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하였다.  
왕실의 보전을 위해 원나라의 후계자(세조 쿠빌라이)를 직접 찾아가 항복한 원종 이래, 고려왕의 지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늘 위태로웠다. 언제 폐위될지 모르는 허약한 왕 아래 부국강병은 실현될 수 없는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했다. 실제로 고려 국왕은 원 황제의 명령에 따라 하루아침에 교체되기 일쑤였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은 모두 원나라 황제의 명령에 따라 폐위되었다가 다시 복위했다. 
고려가 자생력을 잃고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한 충렬왕 때부터 고려는 급속도로 원의 속국으로 전락하였지만, 고려는 대원제국의 ‘사위 나라’라는 우산 아래서 거의 100년간 큰 전쟁을 겪지 않아 문약(文弱)으로 흘렀다. ‘팍스 몽골제국’ 아래서 고려는 평화를 누렸으나, 정치적 독립성을 거의 상실했으며 국력은 신장되지 않았다. 
이처럼 고려가 대몽항쟁 끝에 강화를 성립시킨 1259년(고종 45년)부터 반원운동이 성공한 1356년(공민왕 5년)까지의 97년의 시기를 사학계에서는 ‘원간섭기(元干涉期)’라고 부른다.

몽골에 놀아 난 충렬·충선왕 부자

개성(開城)은 고려시대에는 ‘개경(開京)’으로 불렸다. 
개경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통일신라 말기, 전국이 분열된 상황에서 새로운 통일제국의 패자가 나오려던 시기였다. 대대로 예성강 주변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후고구려의 궁예에게 귀부(歸附, 스스로 와서 복종함)하면서 이곳은 후고구려의 주목받는 지역이 되었다.
개경은 힘찬 기상이 솟아나는 송악산을 진산(鎭山)으로, 자남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오공산을 우백호(右白虎)로, 남쪽의 용수산을 사신사(四神砂)로 한 장풍국(藏風局, 주변을 둘러쌓은 산세)의 명당 도읍지다. 개경은 송악산이 진산이기 때문에 송도(松都)라고 부르는데, 송악산의 본래 이름은 부소산(扶蘇山)이다. 신라의 풍수가 팔원(八元)이 부소산의 형세를 보고 태조 왕건의 4대조인 강충(康忠)을 찾아가 설명했다는 전설이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에 나온다.
부소군을 부소산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기고, 산 전체가 화강암의 큰 바위로 되어 있으니 헐벗은 산에 소나무를 심어서 산의 암석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면 삼한을 통일할 인물이 태어날 것입니다.
강충은 팔원의 말을 그대로 따라 척박한 땅에서도 잘 견디는 소나무를 심었고, 마침내 자신의 후손 왕건이 등장하여 고려를 개국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의 정궁인 본궐(本闕, 본대궐·만월대 등으로도 불림)은 태조 2년(919년)에 철원에서 개경으로 천도했을 때 후고구려의 궁궐을 이용해 창건됐다. 만월대(滿月臺)를 중심으로 궁성(宮城)을 쌓아 궁궐이 들어섰고, 궁성 밖에는 황성(皇城)을 쌓아 중앙관청들이 자리 잡았다. 동서 445m, 남북 150m의 대지에 조성된 궁성에는 궁의 중앙에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이 있고, 회경전 뒤에는 지세가 더 높은 곳에 장화전(長和殿)·원덕전(元德殿) 등 전각이 계단식으로 배치됐으며, 회경전 서북쪽에는 천자의 조서를 받고 사신을 대접하는 건덕전(乾德殿)이 있다. 건물배치는 정남(正南)에 회경전으로 연결되는 승평문(昇平門)이 있고, 이 문을 들어서면 신봉문(神鳳門)이 있는데 그 동쪽에 세자궁으로 들어가는 춘덕문(春德門), 그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太初門) 등 13개 성문과 15개 궁문이 있다. 
문인 이규보(李奎報)의 개경 <황궁찬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 대단하구나.
도성안의 수 만 채 집들은 잉잉거리는 벌떼들이 모인 것 같고
큰길 내왕하는 수 천여 사람들은 개미떼 굼질거리는 것 같구나.’

즉위 7개월 만에 쫓겨난 충선왕
무술년(1298, 충렬왕24) 8월 초순. 

한가위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가을 날씨답지 않게 목에 숨이 턱턱 차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황성의 정문인 광화문(廣化門)을 나온 호송행렬은 거지들의 행군처럼 풀죽은 행색이 역력했다. 충선왕(忠宣王)을 호송하는 행렬은 동쪽으로 난 관청거리(官途관도)를 지나 남대가(행랑을 만들어 비 맞지 않고 다닐 수 있었음)를 따라 개경의 중심지인 십자가(남북대로와 동서대로가 만나는 광장)를 지나 개경에서 80리 떨어진 서경(西京)으로 가는 관문인 금교역(金郊驛, 황해도 서흥에 위치)에 이르렀다.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 아내인 계국대장공주와 함께 원나라로 소환되어 가는 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측은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백성들을 곁눈질로 쳐다보며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충선왕을 전송하기 위해 부왕인 충렬왕 부부를 비롯한 조정 관원들이 금교역에서 주연(酒宴)을 베풀었다. 술이 한 순배 돌고 나자 원나라 사신 패로올(魯兀)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충선왕을 위협했다.
“대원 황제폐하의 영이니 고려왕은 국인(國印, 옥새)을 내놓으시오.”
“아, 알았소이다.”
충선왕이 겁에 질린 얼굴로 옥새를 내주자 패로올은 이를 충렬왕에게 건네줬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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