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 | 곽상순 언론인] 14일(현지시간, 이하 같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각지에서 일련의 초현실주의적인 병렬(竝列) 현상이 발생했다.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전한 주(駐)이스라엘 미국 대사관이 이날 공식 개관하면서 이스라엘 거리들은 축하 인파와 항의 인파로 메워졌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 오래 기능해 왔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 역시 역사적으로 아랍 지역인 예루살렘에 언젠가 그들의 수도를 세우기를 열망한다. 이처럼 분쟁 소지가 있는 지역이기에 유엔 결의에 따라 예루살렘의 지위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최종 합의가 있을 때까지 ‘이스라엘 영토도 팔레스타인 영토도 아닌 곳’으로 남겨져 왔다. 그래서 세계 각국은 유엔 결의를 존중해 이스라엘 주재 대사관을 기능적 수도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실질적 수도이며 국제법상 수도인 제2의 도시 텔아비브에 두어 왔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국제관례를 거슬러 이번에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긴 것이다. 이날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인 가자 지구(地溝)의 분리장벽(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 쪽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친 장벽) 근처에서 예루살렘 주재 미국 대사관 개관에 항의하여 팔레스타인 사람 수만 명이 시위했다. 이들을 향해 이스라엘 군은 실탄과 최루탄을 발포했으며, 이 총격 등으로 50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하고 2000명이 다친 것으로 보고됐다. 사망자에는 여자, 어린이, 구조요원도 있었다.

가자 지구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는 참사가 발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사망자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대신 그는 트위터에 “이스라엘의 엄청난 날, 위대한 날. 축하를!”이라는 글을 올렸다.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미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은 트럼프 대통령의 중대한 약속 이행”이라는 성명을 냈다. NBC방송 등 미국 언론은 이번 총격 사태를 ‘가자 학살(massacre)’이라고 불렀지만, 미국 정부는 유혈 사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의 이런 태도보다 팔레스타인을 더 절망시키고 있는 것은 이슬람권의 변심이다. 과거 팔레스타인을 ‘피를 나눈 형제’로 부르며 이·팔 충돌 때마다 똘똘 뭉쳐 이스라엘에 대항했던 이슬람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의 비극을 외면하고 있다. 몇몇 국가가 이번 사태에 입장을 내놓기는 했으나 그야말로 형식적인 ‘립 서비스’였을 뿐이다. 로이터 통신은 “이슬람권의 침묵으로 팔레스타인이 좌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과거 여러 차례 중동전쟁에서 수억 인구의 이슬람권이 수백만 인구의 이스라엘에 번번이 패한 것도 단결하지 못하는 이슬람 국가들의 속성 때문이라고 국제정치학자들은 곧잘 분석한다.

10년 전만 해도 이·팔 분쟁은 미국 외교정책의 최우선 고려사항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팔 분쟁과 관련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미국의 움직임은 세계 언론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팔 분쟁을 둘러싼 논의가 뜨거웠던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흔들림 없는 지지에 대한 세계 언론의 믿음 때문이다. 미국의 무조건적인 이스라엘 지지는, 2차대전 때 독일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에서 미국과 유럽이 유대인을 보호하는 데 실패한 후 유대인들의 모국에 대한 결의를 특히 미국이 존중하는 데 바탕으로 두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예루살렘 수도 선언’에는 반발도 많았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도 중동 내 갈등을 우려해 이 선언을 뜯어말리는 의견도 있었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는 선언을 강행했다. 여기에는 미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대계를 잡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깔렸다는 게 미 정치권 안팎의 중론이다. 일각에선 미국 내 해묵은 과제를 트럼프가 해결했다는 시각도 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인 1995년 미 의회는 ‘예루살렘 대사관법’을 가결했다. 이스라엘의 수도는 예루살렘이며 주(駐)이스라엘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한다는 내용이다. 실질적으로 미 의회에선 여야를 가리지 않고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약 1000년 이스라엘의 선조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됐다. 유대인과 아랍계가 공존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후 638년 아랍의 이슬람교도들이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다. 이슬람교도들은 기독교의 성지로서 예루살렘을 존중했고 동시에 이슬람 사원도 세우면서 예루살렘을 이슬람교의 성지로도 정의했다. 아랍계와 유대계는 1차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갈등을 겪게 됐다. 갈등의 씨앗은 영국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 싸우던 영국은 아랍계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 위해 아랍권 자치국가 설립을 약속했다. 영국은 동시에 유대인들의 자금을 얻으려 유대계에 예루살렘 땅을 주겠다는 ‘밸푸어 선언’을 한다. 이 선언을 계기로 유대계가 예루살렘으로 대거 이주한다. 영국은 아랍계와 유대계에 ‘이중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1차 대전 후 예루살렘은 영국령이 됐고 아랍계와 유대계의 분쟁이 심화했다. 2차 대전이 시작되면서 아랍계는 유대인을 몰살하겠다는 나치 편에 섰다. 그러나 2차 대전에서 나치가 패배하면서 유대인을 몰아내겠다는 팔레스타인의 계획은 실패한다. 2차 대전이 끝난 1948년 유대계는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국제지구로서 아랍계와 유대계 어느 쪽에도 소유권이 없던 예루살렘은 요르단과 이스라엘이 동서로 양분해 반쪽씩 영유하게 됐다. 유대인들은 아랍계인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내쫓기 시작했고 팔레스타인은 다른 아랍 국가들과 손잡고 1956년 1차 중동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영토 분쟁으로 1967년 3차 중동 전쟁이 발발한다. 이집트와 요르단은 시리아 편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했고 이때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은 6일 만에 시리아-이집트-요르단 연합군을 제압했다. 이때 이스라엘은 요르단이 소유하고 있던 동(東)예루살렘까지 가져갔다. 중동 분쟁을 해소하겠다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1980년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1964년 출범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1988년 독립을 선언하며 자치정부를 세웠고 1993년 ‘오슬로 협정’을 통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의 대사관 이전으로 이 협정은 사문화됐다.

곽상순 언론인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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