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ㅣ고정현 기자] ‘북한式 길들이기’는 우리 정부에만 통하는 것이었을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4일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전격 발표했다. 당초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에 적극적이었다. 지난 3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회담 의사를 즉석에서 수락하더니 “5월까지 만나겠다”며 ‘속전속결’ 의지까지 보였다. 여기에 김 위원장이 4.27 판문점 선언에서 ‘완전한 비핵화’ 의지로 화답하면서 회담 분위기는 무르익는 듯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의 중국 방문 이후 북한의 ‘몽니’가 또다시 시작됐다.

김 위원장은 ‘완전한 비핵화’가 아닌 ‘단계적 비핵화’ 해법을 재확인하며 말을 바꿨다. 이후 북한은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양국의 싱가포르 실무 회담장에도 일방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최선희 북한 외무성은 담화에서 미국 부통령을 능멸하는 수준의 발언을 쏟아내며 적반하장 태도를 보였다. 북한이 6.12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자초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물론 우리 정부는 또다시 ‘중재자’ 역할을 자임할 것으로 보이지만 한미 정상회담 직후 이 같은 사태가 불거짐에 따라 ‘중재자’로서의 역할과 지위가 희미해졌다는 우려가 큰 상황이다. 북한 역시 ‘뒤늦은 수습’에 나서는 듯하지만 미국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라는 관측이다. 결국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만이 현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돌파구가 될 것으로 보인다.

 

- 北 ‘단계적 비핵화’ 재확인→싱가포르 실무회담 불참→최선희 비난 담화→북미회담 취소→‘납작’ 엎드린 北→???

- “급한 쪽은 북한... 트럼프 式 길들이기 배워야 할 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을 취소하는 내용의 서한을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4일(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슬프게도, 나는 싱가포르로 예정됐던 김정은과의 정상회담을 취소해야만 했다”며 서한을 공개했다.
 
서한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한 최근 협상 및 토론과 관련해 당신이 들인 시간과 인내, 노력에 크게 감사드린다”며 “당신과 그곳(싱가포르)에서 만날 것을 정말 기대했었다”고 했다. 이어 “슬프게도, 당신의 최근 성명서에 나타난 엄청난 분노와 열렬한 적대감에 근거해, 오랜 시간 계획한 이번 정상회담을 지금 갖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정은, 시진핑 독대 후 ‘돌변’
중국 지원 약속받았나?

 
이와 관련해 싱가포르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의 전격적인 북미 정상회담 취소는 최근 거친 언사로 미국을 비판한 북한에 대한 일종의 벌 주기라는 보도를 내놨다. 싱가포르의 일간지 더 스트레이츠타임스는 25일 이같이 보도하며 전문가들의 분석도 함께 실었다. 싱가포르 난양공대 라자나트남 국제연구소의 그레이엄 옹-웹 연구원은 “이는 (북한의) 나쁜 행동에 대한 일종의 벌 주기”라고 진단했다.
 
북한은 ‘판문점 선언’ 직후엔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김 위원장이 극비리에 두 번째 중국을 방문한 지난 5월 7~8일 이후 북한의 태도는 급변했다. ‘완전한 비핵화’를 선언한 4.27 판문점 선언의 내용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단계적 비핵화’ 해법을 재확인했다.
 
중국에게 북핵 문제는 미국과의 안보와 통상 문제를 조율할 수 있는 ‘카드’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배후론’등을 공개적으로 언급하면서 북한에 대한 제재 유지 필요성을 강변한 것 역시 이런 인식 때문이다. 결국 김 위원장에게 시진핑 주석이 미국의 제재에도 버틸 수 있는 지원을 약속했고 이로 인해 수세에 몰려있던 김 위원장에겐 ‘플랜 B’의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지난 13일 ‘안보 사령탑’인 존 볼턴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 의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핵·미사일 장비와 물질을 미국으로 가져오는 방식을 언급한 데 대해 북한이 맹비난한 것도 북한이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분석이다.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16일 ‘선(先) 핵폐기, 후(後) 보상’의 리비아식 핵폐기를 주장해 왔던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맹비난하면서 “미·북 회담을 재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트럼프 행정부 핵심 인사들이 거론해 온 ‘리비아식 비핵화’를 사실상 걷어찬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볼턴 보좌관 역시 이튿날 북한의 성명과 관련해 “미국은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에서 후퇴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입장을 고수했다.
 
동시에 북한은 우리 정부에도 ‘남북 고위급 회담 취소(16일)→풍계리 폭파 남측 기자 취재 거부(18일)→탈북 종업원 북송 요구(19일)’의 순서로 ‘몽니’를 부리며 ‘비핵화 허들을 낮추도록 미국을 설득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능멸 수준 담화문’·‘일방적
약속 깨기’에 美 분노 ‘폭발’
 

이처럼 양국이 악화일로를 거듭하는 상황에서 지난 24일 기름을 붓는 사건이 발생했다. 최선희 북한 외무상이 펜스 부통령을 능멸하는 수준의 담화문을 쏟아낸 것이다. 최선희 외무상은 이날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21일 미국 부대통령 펜스는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조선이 리비아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느니, 북조선에 대한 군사적 선택안은 배제된 적이 없다느니, 미국이 요구하는 것은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라느니 뭐니 하고 횡설수설하며 주제넘게 놀아댔다”라며 “미국 부대통령의 입에서 이런 무지몽매한 소리가 나온 데 대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라고 비판했다.
 
이어 최선희 부상은 “그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인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국의 고위 정객들이 우리를 몰라도 너무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며 “우리도 미국이 지금까지 체험해보지 못했고 상상도 하지 못한 끔찍한 비극을 맛보게 할 수 있다. 펜스는 자기의 상대가 누구인가를 똑바로 알지 못하고 무분별한 협박성 발언을 하기에 앞서 그 말이 불러올 무서운 후과에 대해 숙고했어야 했다”라고 경고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일방적인 약속 깨기 등도 미국의 회담 취소 배경으로 지목된다. 24일(현지시간) 진행된 컨퍼런스콜에 나선 고위 관계자는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지난 9일 방북했을 때, 양측은 지난주에 싱가포르에서 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회담을 하기로 했었다”면서 “그러나 북한은 아무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북한은 우리를 바람 맞혔다”고 비판했다.
 
이 관계자는 “북한에 수많은 연락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면서 “이 같은 대화 중단은 심각한 신뢰 부족을 암시한다”고 강조했다. 또 이날 북한의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에 대해서도 “북한은 전문가를 현장에 초청하겠다는 약속을 깨뜨렸다”면서 “(현장 취재를 한) 미국 CBS 방송도 검증을 할 수 있는 전문가가 없다고 보도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 같은 이유로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통보하자 북한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일방적인 회담 취소 통보에도 불구하고 북한 측이 ‘미국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힌 것은 우리 정부를 대하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조선중앙통신은 25일 김계관 제1부상이 ‘위임에 따라’ 담화를 발표했다며 “우리는 아무 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 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용의가 있음을 미국 측에 다시금 밝힌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담화 전문을 게재했다.
 
김 제1부상은 지난 16일 개인 명의의 담화를 통해 미국 측에 ‘북미 정상회담 재고려’ 카드를 처음으로 던진 장본인이다. 그런데 김 제1부상이 다시 나서서 이례적으로 ‘예의 있는’ 톤으로 대화를 계속하자는 메시지를 보낸 것은 대미 비난의 물꼬를 튼 인물로 소위 ‘결자해지’를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불러온 ‘뇌관’으로 최선희 부상의 담화를 지목했지만, 김계관 제1부상이 나선 것은 그가 최 부상의 직속상관으로서 보다 책임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급한 쪽은 우리나 미국이 아니라 북한이라는 게 입증된 셈이다”라며 “김정은 식 길들이기에 놀아날 게 아니라 트럼프 식 길들이기를 배워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이번엔 뭔가 될 것 같다”던 靑
‘중재자’ 역할 시험대에...
 

한편 한미 정상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북미회담을 전격 취소함에 따라 문재인 대통령의 북미 간 중재자 역할도 큰 고비를 맞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의 애초 구상은 남북정상회담을 마칠 때만 해도 국민들을 ‘장밋빛 미래’에 취하게 했다. 회담에서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확인한 판문점 선언이라는 결실을 얻었고 이를 토대로 북미 정상이 구체적 방법론을 담판 지어 한반도 비핵화를 이루겠다는 게 문 대통령의 구상이었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의 ‘말 바꾸기’가 다시 시작됐다. ‘완전한 비핵화’는 ‘단계적 비핵화’로 바뀌었고,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행사를 취재할 한국 기자 명단 접수를 거부하는 등 억지스러운 언행을 이어갔다. ‘한반도 운전자’를 자임해 온 문재인 정부를 떠보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길들이겠다는 속내로 비치는 대목이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판문점 선언 직후 “이번에는 뭔가 될 것 같다”고 한 발언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결국 지금의 난관을 타개할 유일한 돌파구는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는 것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의 반응을 종합하면 미국이 원하는 ‘완전한 비핵화’는 북한의 핵무기 또는 관련 장비 일부를 미국에서 해체하는 정도에 준할것으로 관측된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