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도균 필두로 강전한·이선용·박경수·남기연·은기학 뭉쳤다

차도균 씨가 카페 비틀즈 벽면을 장식한 LP판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한국전쟁 후 미8군과 함께 미국문화도 물밀 듯 들어왔다. AFKN 라디오, 음악감상실 등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온 미국 문화와 음악은 당시 청춘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1963년 한국 그룹사운드의 효시가 된 그룹이 탄생했다. 키보이스다. 원년 멤버였던 베이시스트 차도균을 필두로 이들이 다시 뭉쳤다. 약 50년 만이다.
 



‘한국의 비틀즈’ 1960년대 그룹사운드 선두주자 키보이스 원년 멤버
“후반전이니 음악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팬들에게 보답하는 것”





‘키보이스(key boys)’라는 그룹명이 낯설다면 노래 하나를 떠올려 보자.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그렇다. 바로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 히트한 ‘해변으로 가요’의 주인공이다. 이 밖에도 ‘바닷가의 추억’ ‘정든 배’ 등이 키보이스의 히트곡으로 있다.

이들에겐 별칭이 또 있는데, 바로 ‘한국의 비틀즈’다. 이들은 노래를 영국 리버풀 출신의 전설적인 4인조 밴드 비틀즈의 노래를 번안해 부르는 건 물론이요, 스타일링까지 그들을 기가 막히게 벤치마킹했다.

1960년대 중후반으로 접어들며 멤버들이 하나둘씩 탈퇴하며 키보이스 1기는 마감됐다. 그 뒤 멤버가 바뀌어 2, 3기로 활동을 이어갔다.

차도균은 베이시스트로 활동한 키보이스 원년 멤버다. 1, 2기를 거쳐 솔로 활동을 하던 그가 다시 ‘키보이스’로 돌아왔다. 다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베이스가 아닌 마이크를 잡았다는 것.

늘 새로운 도전을 서슴지 않는 차도균 씨를 서울 논현동에 위치한 카페 비틀스에서 만났다. 그의 전력과 퍽 어울리는 장소였다.
 
음악 여정 출발은
사실 ‘키(cky)’보이스

 
대중 앞에 오랜만에 나선 그의 눈은 여전히 형형했다. 먼저 당시 그룹사운드의 한 획을 그은 ‘키보이스’의 탄생 비화를 물었다.

차 씨는 “KBS 전속가수가 됐는데 그 영예를 포기하고 (미8군 무대로) 갔다. 난 팝이 좋았다”고 미8군 입성 계기를 들려줬다. 이어 “1963년에 윤항기라는 친구를 만나 둘이 속닥속닥해 키보이스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를 추억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젊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재밌는 사실은, 키보이스의 ‘키’가 처음부터 ‘열쇠’라는 뜻을 가졌던 것은 아니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최초의 키보이스의 ‘키’는 키(key)가 아니라 닉키 넬슨(Nicky nelson)처럼 이름 뒤에 붙는 키(cky)를 썼다. 이후 여성 멤버가 투입됐는데, 여성 멤버를 ‘자물쇠(Lock)’로 칭하라는 말에 따라 ‘락앤키’가 결성됐고, 후에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키보이스가 된 것이다.

노장 키보이스가 50년 만에 새 옷을 입었다. 먼저 원년 당시 베이시스트로 활동했던 차도균 씨가 이번에 보컬을 담당하게 됐다.

차 씨를 주축으로 음악감독 강진한 씨가 편곡과 브라스(관악기)를 맡고, 이선용(키보드)·박경수(드럼)·남기연(기타)·은기학(베이스) 등의 멤버가 투입됐다.
 
재결합 부담?
오히려 가슴 벅차

 
현 4050세대만 해도 키보이스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고, ‘해변으로 가요’는 요즘 젊은 층의 귀에도 익은 세대불변 히트송이다. 오히려 이러한 과거의 업적들로 인해 재결성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을까.

차 씨는 “오히려 가슴 벅차고 기뻤다”면서 “‘살다 보니 이런 순간이 있구나’ 했다”고 말했다. 이어 키보이스 활동을 재개하면서 갖게 된 포부를 들려줬다.

그는 “하나의 욕심이 있다면 좀 더 성숙하고 짜임새 있는 음악을 들려 줘야겠다는 거다. 후반전이니 음악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팬들에게 보답하는 것 아닐까”라고 설명했다.

이것이 단순히 포장하기 위한 말이 아니며, 그가 키보이스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뒤이은 그의 말이 입증했다.

그는 “노래하는 사람은 몸 찌그러지면 끝”이라고 단언하면서 “내가 과거(의 영광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소리를 딱 내봤을 때 ‘어?’ 이러면 (무대 내려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위 사람들에 의하면 차 씨는 요즘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남한산성에 가 발성연습을 하고, 운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한다. ‘목소리’를 잘 내기 위해서다.

이러한 반응을 보며 그는 “게으르면 (노래) 못한다. (연습 하는 건) 당연하다”면서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

이와 더불어 “키보이스를 다시 부활시킬 수 있는 영광을 줬으니 그것에 감사드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와 건강을 지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단독 콘서트 예정
싱글 준비 박차

 
앞으로의 키보이스 활동은 어떻게 진행될까. 먼저 다가오는 여름, 다양한 축제에서 팬들을 만나볼 계획이라 한다.

뒤이은 9월에는 단독 콘서트가 예정돼 있다. 현재는 콘서트 전에 새단장한 키보이스의 싱글이 나올 수 있도록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해변으로 가요’를 뛰어넘을 수 있는 곡이 나올 수 있느냐고 장난스럽게 묻자 차 씨는 “그만큼 하려면 내가 다시 10대로 돌아가야 하는데”라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가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의 눈빛을 살펴보면 ‘청춘’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청춘은 물리적 나이라는 뜻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가슴속에 ‘푸른 봄’을 간직한 이는 언제까지고 청춘에 머물러 있다.

차 씨에게 후배 가수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세월에 따라 음악 장르 등은 변할 수밖에 없다”면서도 “가수라면 최소한 항상 무대와 내가 왜 노래하는 사람인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어 “늙고, 머리 빠지고, 주름살 생기고 이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니 애써 거스를 필요가 없지만, “목소리는 살아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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