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선왕, 4년 만에 조비와 해후

정월이 깊어가는 어느 날.
만월대 정원의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하얗고 탐스러운 눈꽃이 피었다.
눈부시게 펼쳐진 설경에 마음이 들뜬 충선왕은 쉴 새 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조비(趙妃)의 처소를 찾았다. 조비는 조인규의 딸로 세자빈이었으나, 충선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면서 두 번째 부인으로 밀려나 있었다. 방안에는 향내가 그윽하였는데 문득 벽에 걸린 《시경(詩經)》의 한 구절이 시선에 들어왔다.
하루 동안 못 보아도 석 달을 못 만난 듯하네.
(一日不見 如三月兮 일일불견 여삼월혜)
충선왕은 낭군이 돌아오기를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조비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감격하여 눈물을 글썽이던 조비는 지아비의 곁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앉았다. 조비는 보통 키에 포동포동한 몸매, 명경지수 같은 눈동자, 백옥 같은 피부, 탐스러운 가슴을 가진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부처님의 자비와도 같은 넉넉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전하, 얼마 만이옵니까? 소첩은 지난 4년 동안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로 전하와의 해후를 기다려 왔나이다.”
“미안하오. 꽃다운 나이에 과인에게 시집와서 오랜 세월을 기다리게 해서. 과인은 원나라 연경에서 한시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소이다. 과인이 못나서 서신조차 제대로 보낼 수 없었는데, 과인을 많이 원망했을 게요.”
“전하, 오늘 이렇게 뵙게 되니 그동안 맺혔던 한이 봄눈 녹듯이 다 풀리는 것 같사옵니다.”
“과인은 앞으로 그대를 외롭게 하지 않을 것이오. 믿어 주시오.”
“아이, 전하…….”
어여쁜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괸 조비는 충선왕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어 그녀는 젊음이 용솟음치는 지아비의 몸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충선왕의 심신은 매우 평화로웠다. 그는 조비의 허리를 으스러지듯이 끌어안고 탐스러운 가슴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기다림에 지쳐 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이내 한 몸이 되었다. 옛정을 되살려 하룻밤의 운우의 정(雲雨之情)을 나눈 그날 이후, 충선왕은 부쩍 조비의 처소를 자주 찾았으며, 나중에는 아예 밤마다 조비의 처소로 거동했다.
한편, 계국대장공주는 충선왕과 조비의 사랑놀이를 먼발치에서 하릴없이 지켜만 봐야 했다. 기다림에 지친 그녀는 충선왕의 마음을 돌리려고 별의별 궁리를 다했다.
원나라에서 데려온 시녀들로부터 방중술을 익히고 소녀경을 탐독하기도 하고, 사향 향수를 자신의 손목과 목, 귀 뒤, 그리고 가슴에 뿌리고 충선왕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계국대장공주의 이같은 각고의 노력은 허사가 되고 말았다. 오로지 남편 하나만을 의지하고 고려로 시집온 원나라 공주는 배신감에 치를 떨고 외로움에 몸부림을 쳤다.
그러던 어느 날. 계국대장공주가 고려에 시집온 지 불과 다섯 달 만의 일이었다. 계국대장공주는 풍만한 가슴을 내밀고 꼿꼿이 서서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충선왕을 똑바로 쳐다보고 자기보다 조비에게 온통 마음이 쏠린 이유를 따져 물었다.
“전하, 요사이 전하께서는 국사는 소홀히 하고 잉첩(妾, 시중드는 첩)의 처소에서 두문불출하고 계시는데 이를 어찌 임금의 도리라 하겠나이까?”
“공주는 국사에 관여하지 마세요. 국사는 임금인 과인이 알아서 할 테니.”
“무신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고려를 누가 구해주었나이까? 전하는 벌써 원나라 황상의 은혜를 잊었나이까?”
“고려가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재생지은(再生之恩)을 입에 담는 저의가 무엇이오?”
“신첩을 이리 타박하시고도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이까?”
“공주, 무엄하오. 말조심하시오.”
“전하, 신첩은 원나라 황태후에게 오늘의 참담한 심정을 고할 수밖에 없나이다.”
“마음대로 하시오.”
계국대장공주의 눈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였다. 여염 사대부가에서도 투기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이라고 했는데, 내놓고 억울한 심경을 토로할 수 없는 그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어쩔 수 없이 맺어진 왕실 간의 정략결혼이었지만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계국대장공주는 자신이 너무나 비참했다. 목석같은 충선왕은 사랑의 대상에서 점점 증오의 대상으로 변해갔다.
점입가경(漸入佳境)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는 법’이라고 했던가.
이에 계국대장공주의 유모, 무뢰한들이 공모하여 조비를 무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해(1298년) 5월. 계국대장공주는 종신(從臣) 활활불화(闊闊不花)·활활알(闊闊)·대장군 김정(金精)·오정규(吳挺圭)를 원 황태후에게 보내어 조비를 무고하는 편지를 전하게 했다.

<황태후 마마님께>
충선왕은 조인규의 딸인 조비만 총애하여 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사옵니다. 그는 원나라 황상의 은혜를 저버리고 정방을 폐지하고 종전의 고려 관제를 복구하였사옵니다. 아울러 조인규를 수상에 임명하여 사림원을 중심으로 원나라에 반대하는 정사를 펴고 있사옵니다. 대원제국의 위상과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충선왕의 오만방자를 방치해서는 아니 될 것으로 아옵니다. 황태후 마마님의 간곡한 보살핌을 앙망하옵니다.
무술년 5월 병술일. 계국대장공주 올림

며칠 뒤. 사재주부(司宰主簿, 종칠품) 윤언주(尹彦周)가 익명의 대자보를 대궐문에 붙였다.
“조인규의 처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여 왕이 계국대장공주를 사랑하지 않도록 저주하고 자기 딸(조비)만 사랑하도록 해달라고 빌었다.”
윤언주는 일찍이 조인규로부터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 일이 있어서 그것을 늘 원망해 오다가 공주가 조비를 시기하는 것을 알고 참소를 한 것이다. 조씨 일문을 멸망시켜 원수를 갚고 일이 잘되면 공주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승차할 수도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 일전쌍조(一箭雙鳥)의 모략을 부린 것이다.
이 사건의 파장은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더욱 확대되었다. 이에 계국대장공주는 상락백(上洛伯) 김방경(金方慶)과 충선왕의 만류를 무시하고 조비를 비롯해 조인규와 그의 처, 아들, 사위인 최충소(崔沖紹), 박선(朴瑄) 등을 하옥시킨 후, 조인규와 그의 처를 원나라로 압송하여 혹독하게 국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른바 ‘조비무고사건’은 이렇게 완결되었다.
원나라 황태후는 승려 5명과 도사 2명을 보내 공주에게 저주한 것을 깨끗이 씻도록 푸닥거리를 하고, 홍군상(洪君祥)을 보내 왕에게 향연을 베풀고 공주와 사이좋게 지내라고 권했지만, 충선왕과 계국대장공주는 끝내 부부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불화는 끝내 충선왕의 실각을 가져왔다. 충선왕은 즉위 7개월 만에 국인(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소환되었는데 이때 안향(安珦)이 수종(隨從)했다.
원나라의 연경 황성에 도착한 충선왕은 황제의 부름을 받자 몹시 두려워했다. 이에 원 승상이 나와 안향에게 물었다.
“고려 왕이 어찌하여 공주를 가까이하지 않소?”
“궁중의 일이란 본래 다른 나라의 신하가 알 바가 아니요. 오늘 이런 것을 물어서 무슨 아뢸 만한 내용이 있겠소?”
안향의 기지로 충선왕을 위기에 구해내었지만, 충선왕은 다시 즉위할 때까지 10년 동안 계국대장공주와 연경에서 머물면서 별거 생활을 하였다.
1298년 8월. 충렬왕은 복위한 뒤 원 황제에게 사례하고 충선왕이 뜯어고친 관제를 다시 복구했다. 이로써 충선왕의 개혁정치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고려 국왕의 권한은 더욱 축소되었다. 이후 충렬왕은 충선왕파를 제거하는 한편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과 음주가무에만 몰두하는 등 암군(暗君)의 길을 걷는다.
승지(承旨, 광정원의 종6품) 오잠(吳潛)은 왕이 연락(宴樂)을 좋아하는 것을 미끼로 왕의 전속 악단을 조직하고 전국을 돌며 기생을 선발하는가 하면 개경의 무당과 관비 중 가무에 능한 자를 뽑아 남장을 시킨 뒤 일종의 뮤지컬을 공연하고 <쌍화점(雙花店)>을 만들어 보급하기도 했다.

충선왕, 원나라 황제를 옹립하고
10년 만에 왕위에 복위하다

이후 7년이 바람처럼 흘러 을사년(1305, 충렬왕31)이 되었다.
찬성사(贊成事, 시중 정승 다음 정2품) 왕유소(王維紹)를 비롯한 송린(宋璘)·송방영(宋邦英)·석천보(石天補, 환관) 등의 간신배들은 충렬, 충선 부자간의 이간을 일삼았다. 그리고 연로한 충렬왕의 유고 시 충선왕이 복위할 것을 걱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날마다 이마를 마주대고 충선왕을 폐하는 비책을 강구했다.
그 결과 원나라의 황후와 승상 아홀대(阿忽臺) 등을 움직여 독로화(禿魯花, 볼모)로 원나라에 있던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 충렬왕의 10촌 종제)에게 왕위를 계승시키기로 했다. 이를 위해 계국대장공주를 왕전에게 개가(改嫁)시키려는 음모를 꾸며내어 충렬왕을 유혹했다. 충선왕이 계국대장공주와 이혼하게 되면 충선왕의 권력 기반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305년 11월. 충렬왕은 왕유소 일당의 회유와 참언에 눈멀고 귀먹어 별거 중인 며느리의 개가를 성사시키려고 직접 원나라에 가서 2년간 머물렀다.
어느 날 왕유소 등이 원나라 우승상 탑라한에게 충선왕을 모함했다.
“충선왕은 평소에 아들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공주와도 화합하지 못하므로 충렬왕이 미워하여 서흥후 왕전을 후계자로 삼으려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라도 충선왕이 중이 되게 하고, 왕전을 공주와 결혼시킨다면 충렬왕의 뜻에 맞을 것입니다.”
이에 탑라한은 매서운 눈빛으로 왕유소 등을 노려보며 반문했다.
“충선왕은 쿠빌라이 황제의 외손자이고 계국대장공주도 종실의 공주인데, 개가하고 폐적(廢嫡, 적자로서의 신분을 폐함)하는 것이 도리에 온당한 일인가?”
“…….”
“서흥우 왕전이 충렬왕의 아들인가?”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의 아들이란 말인가?”
왕유소 등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하릴없이 물러 나와야 했다.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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