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의 풍경은 소박하다. 일렁이는 파도조차 잔잔하고 소란스러움 없이 조용히 계절을 담고 있다. 바다와 나란히 이어진 길 곳곳에 안내자가 되어 서 있는 등대를 따라 여유로운 부산의 봄을 만끽해 본다.
 
          해운대구를 지나 기장으로 들어서면 주변 분위기가 단번에 달라진다. 높은 빌딩과 도로를 꽉 채운 차들은 사라지고 낮은 집과 작은 해안 마을이 나타난다.

부산의 최남동 지역에 위치한 기장은 최근 핫플레이스로 부상하면서 여행객들이 꽤 많아졌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기장은 생각 외로 조용했다.

유명한 몇 곳 외에는 북적대지 않아 오히려 여유롭게 산책하듯 둘러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소박한 풍경으로 남은 기장 여행. 해안로를 따라 오르다 보물찾기 하듯 우연히 발견한 기장의 이색 등대들은 부산이 숨겨놓은 깜짝 선물 같았다.

봄볕에 맑게 일렁이는 기장의 앞바다는 이국의 바다와 전혀 다른 매력을 전했다. 복잡한 도심에서 벗어나 작은 항구가 들어선 고즈넉한 풍경을 마주하고 싶은 이들에게 잔잔한 휴식처가 돼 주는 기장에서 또 다른 부산을 만나고 왔다.
 

기장 여행의 시작,
해동 용궁사

 
해운대와 가까워 해운대구에 속해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용궁사는 기장군에 속해 있다. 워낙 유명한 사찰이다 보니 입구에서부터 주말 나들이를 나온 여행자들로 정신이 없다.
         기장에서 가장 여행객이 많은 곳이 아마도 용궁사가 아닐까. 일주문을 들어서면 십이지석상이 일렬로 늘어선 숲길이 나타난다.

올해 삼재인 범띠, 개띠, 말띠 석상 밑에는 붉은색으로 ‘삼재’라고 적혀 있다. 석상을 지나면 좌측으로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108계단이 보인다.
         이 계단 입구에서 둥근 배를 드러낸 득남불이 호쾌한 미소를 짓고 있다. 배를 만지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 덕분에 배 한 쪽만 까맣게 손때가 탔다.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미세한 파도소리가 들린다. 바다와 가까운 사찰만이 가지는 특별한 배경음이다. 계단 아래에서 바로 이어지는 용문석굴을 지나면 드디어 용문교 너머로 바다를 마주한 해동 용궁사의 모습이 드러난다.
         절벽 밑에 자리하고 있는 바위에 잔잔히 부딪히는 파도, 기이한 형태로 쌓인 돌탑과 그 위로 동해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 해수관음대불. 외국인 여행자는 그 신비로운 풍경을 담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다리를 건너 사찰로 들어서자 복을 부르는 황금돼지와 지하의 샘터, 대웅전 등 곳곳이 사람들로 가득하다. 인파를 피해 용궁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해수관음대불로 올라간다.

소란스러운 사찰을 바라보는 부처의 미소는 용궁사에서 유일하게 여유롭다. 마침 해수관음대불의 머리에 앉은 비둘기가 소란한 인간 세상을 구경하듯 바라보고 있다.
 
우연히 만난 하얀 등대의 비밀,
젖병등대
 

기장군에서 해안로를 따라 여행하다 보면 이색적인 등대를 자주 보게 된다. 그중 용궁사에서 죽도로 가는 길에 만난 젖병등대는 순전히 우연한 발견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아기 젖병 모양을 본떠 만든 등대는 확실히 여행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할 만큼 독특하고 귀여웠다. 
 
        마을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 외따로 서 있는 이 등대는 계속해서 감소하는 대한민국의 출산율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등대까지 이어진 길바닥에는 연도별 출산율이 적혀 있다. 점점 줄어드는 숫자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씁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단순히 예쁜 형태의 등대라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젖병등대. 사진동호회 사이에서는 일출 명소로도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기장의 유일한 섬, 죽도
 
바다를 우측에 두고 길을 따라 올라가면 연화리에 닿는다. 연화리 앞바다에는 죽도라 불리는 섬이 있다. 죽도는 기장군의 유일한 섬인데, 사실 섬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작은 편이다. 그래도 기장에서는 기장 팔경 중 2경으로 꽤 이름난 곳.
       섬 중앙에는 대나무 숲이 있고 외곽은 방문자를 완강히 거부하듯 철조망과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다. 육지와 섬을 잇는 연죽교 역시 죽도 근처까지만 이어졌다.

섬 전체가 사유지로 지정되어 있어 섬 내부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따라 다리를 건너자 갯바위에서 산책을 즐기는 연인이 눈에 띄었다. 섬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갯바위를 통해 섬을 한 바퀴 둘러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화리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아낙 두 명이 갯바위 사이에서 조개를 캐고, 마을로 들어오는 어선 한 척이 소리 없이 곁을 지난다. 멀리 수평선을 따라 나란히 서 있는 세 개의 등대가 시선을 멈추게 한다.
 
<tip> 죽도에서 볼 수 있는 풍경

젖병등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죽도에서 더 가깝게 보이는 세 개의 등대. 왼쪽부터 월드컵기념등대와 하얀 장승등대 그리고 노란 장승등대다.

하얀색 등대는 천하대장군, 노란색 등대는 지하여장군이며 각각 마징가Z와 태권V를 형상화했다. 월드컵기념등대는 육지와 이어져 있고 나머지 두 개의 장승등대는 바다에 섬처럼 동떨어져 있어 도보로 갈 수 없다.

이 등대 사이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이 아름다워 일출 명소로 꼽힌다. 일출이 아니더라도 나란히 서 있는 등대의 모습은 옛 선조들이 정한 기장 2경이 아닌 현재의 기장 2경을 만들어 낸다.
 
      조용한 그러나 활기찬 항구,
대변항
 

대변항은 작지만 깨끗하고 조용하지만 활기차다. 항구 특유의 생선 비린내가 거의 느껴지지 않고 갈매기마저도 소리 없이 머리 위를 날아다닌다.

보통 항구의 바닷물은 탁한 곳이 많은데 대변항의 바닷물은 푸른 청색을 띤다. 항이 그리 큰 편은 아닌지라 구경하는 이도 적고, 정박해있는 어선도 많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기장스러운 풍경이지 않을까.
      화려하고 번화한 분위기는 분명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 대변항 앞에는 멸치광장이 있다. 은빛 멸치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낸 멸치 조형물이 광장 중앙에서 햇빛에 반짝인다.
      매년 봄이 되면 대변항 인근에서 10~15cm나 되는 대멸이 많이 포획되는데 전국 어획량의 60%가 이곳에서 잡힌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4~5월만 되면 대변항은 멸치잡이가 한창이고 이때 잡힌 멸치를 맛보기 위해 대변항을 찾아오는 여행객들이 많아진다.
      아니나 다를까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어디선가 한두 명씩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 했다. 사람들이 몰리자 식당에서도 호객을 하기 위해 직원들이 거리로 나섰다. 조용했던 항구가 순식간에 활기로 넘쳐난다.
 
      <infor> 봄 제철 생선
기장 멸치

봄에 기장 여행을 한다면 일단 멸치를 맛봐야 한다. 이 시기에 잡힌 멸치 맛이 가장 좋기 때문. 대변항 인근 대부분의 식당에서 멸치 요리를 맛볼 수 있으니 어떤 곳이든 일단 들어가 자리를 잡을 것.
 
     멸치 회무침
봄에 맛이 더욱 좋다는 멸치 회를 초고추장 양념과 양파, 미나리 등의 채소와 함께 버무린 회무침이다. 상큼한 양념에 버무린 멸치 회를 상추와 깻잎에 싸서 먹거나 미역과 함께 먹으면 더욱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멸치찌개
두툼한 멸치와 시래기, 된장과 고추장 등 각종 양념으로 맛을 낸 찌개. 막상 먹어보면 찌개라기보다는 조림에 가깝고, 꽁치와 식감은 비슷하지만 비린내가 전혀 없어 먹기 좋다. 기호에 따라 산초가루를 살살 뿌려 먹으면 담백하면서도 향긋한 맛이 일품이다. 

2002년의 추억,
월드컵기념등대

 
죽도에서 본 월드컵기념등대는 기둥 하단이 동그란 축구공 모형으로 되어 있다. 혹시나 자세히 볼 수 있을까 해서 찾아간 방파제. 대변항을 지나자마자 방파제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에서 등대까지는 약 400m. 방파제 밑에는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운 채 수다 삼매경이다. 해가 가장 강한 한낮의 시간, 수면에 비친 햇살이 눈부시다.
 
    좌측으로는 너른 바다의 풍경을, 우측으로는 장난감처럼 작아진 대변항을 바라보며 걷다 보면 금방 등대에 도착한다.

월드컵기념등대는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등대. 그 이름 그대로, 등대 앞에는 연도별 역대 월드컵 경기를 유치했던 국가와 각각의 월드컵 공인구의 모형들이 진열돼 있다.

방파제 벽면에 조각된 히딩크 감독의 얼굴은 반갑기까지 하다. 2002년 월드컵 경기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잊지 못하는 시간이 아닐까. 등대를 보고 있으니 그 옛날 붉은색 티셔츠를 입고 대한민국을 외쳤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기장 해안로의 작은 성,
죽성드림성당

 
구불구불 이어진 해안로를 따라 오르자 절벽에 아슬아슬 서 있는 죽성드림성당이 나타났다. 다홍색 지붕과 하얀 색, 회색 벽면으로 이루어진 성당의 모습은 기장의 작은 해안마을과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듯 이국적이다.
   절벽 위의 성당이 배경처럼 넓게 뻗은 바다와 함께한 풍경은 마치 한 장의 그림엽서와 같다. 거칠게 부는 바람에도 성당을 찾은 사람들의 얼굴은 밝다. 건물 앞에서 저마다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고, 거친 바윗길을 오르내리며 절벽 난간까지 걸어간다.
   용궁사에 이어 기장군에서 여행객들이 가장 많았던 죽성드림성당은 2009년 방영됐던 월화드라마 ‘드림’의 촬영 세트장이다. ‘성당’이지만 성당으로서의 역할은 하고 있지 않는 성당. 내부는 소규모 갤러리로 운영 중이며 다양한 전시를 진행한다고 한다. 부산에서도 손꼽히는 데이트 코스이자 스냅 사진의 명소다.
 
   숨은 보물, 두호 벽화마을
 
죽성드림성당의 맞은편에 보물처럼 숨은 여행지가 있다. 바로 두호 벽화마을이다.
  멀리 갈 필요 없이 그저 성당을 등지고 앞으로 쭉 걸어 들어가기만 하면 마을 안에 도착한다. 마을을 꾸미고 있는 벽화들 대부분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따스한 햇볕처럼 푸근한 색감의 그림이 많다.
  골목골목 이어진 길에는 나비 혹은 천사의 날개, 꽃과 새 등 다양한 벽화가 마을 구석구석 숨어 있다. 낮은 담벼락과 낮은 집들로 이루어진 두호의 마을 풍경은 평화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만든다.

지도에 ‘두호 벽화마을’을 검색하면 나오지 않는 것이 아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좋다. 나만 알고 싶은 여행지라는 타이틀을 과감하게 건네어 본다.
  이곳에서 산책하는 시간만큼은 길을 잃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가고 싶은 골목으로 과감하게 발을 디뎌 본다.
  
<사진제공=여행매거진 G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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