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실향민의 지독한 기다림…시간이 없다

<뉴시스>

[일요서울 | 권가림 기자] 8.15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기대감이 남북정상회담 이후 커지고 있다. 특히 고령이 된 1세대 이산가족들은 돌아가셨을 부모님의 묫자리라도 찾고 싶다며 구슬픈 망향가를 부르고 있다. 고향을 잃고 혈육을 잃은 ‘실향민(失鄕民)’.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지 못하는 이들이 남은 일생에서 이루고 싶은 유일한 소원이 무엇인지 일요서울이 들어봤다.


-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1896명…7만4772명 사망
- “의례적 정부 업적으로 끝나면 안 돼…생사 확인부터”



1·4후퇴 당시 작별인사조차 못하고 부모님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김금옥 씨.

김 씨의 고향은 개성이다. 지난 1951년, 당시 중학생이었던 김 씨는 잠시만 피신하면 돌아올 수 있다는 이웃들의 말에 대동강을 건넌 게 어언 70년이 다 돼 간다. 그는 “쌀 한 말 먹을 동안만 피해 있으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안심해 책가방과 교복을 챙기고 서울에 있는 외갓집으로 갔다”며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나온 게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부모님 생사도 모르고 고향에 가 보지도 못할 줄은 몰랐다”라며 울먹였다.

김 씨는 가족의 생사 확인을 위해 유전자 검사와 생사확인 신청 등을 했지만 적십자사로부터 아무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

김 씨는 ‘판문점 선언’으로 형성된 이산가족 상봉 분위기에 기대를 하고 있다. 돌아가셨을 부모님의 흔적이라도 찾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다. 그는 “내가 지금 90을 바라보는 나이다.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겠지만 어디에 묻히셨는지 묫자리라도 보고 싶다”며 “북미회담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서 고향 땅이라도 한 번 밟아볼 수 있는 것, 그것이 죽기 전 바라는 바다”라고 되뇌었다.

맹상옥 씨는 지난 2016년 생을 마감한 어머니 생각에 한숨을 내쉬었다. 

북에 남겨놓은 큰딸과 부모님, 여동생을 그리워하며 어머니가 그토록 바랐던 일이 살아계실 적에 이뤄지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한숨이었다.

강원도 평강군 출신인 그는 지난 2000년 가족의 생사확인을 신청했지만 돌아온 답변은 ‘생사확인 불가’였다. 맹 씨는 8·15 이산가족 상봉에 대해 “일회성 전시효과다. 100명 정도만 가족을 만날 수 있다. 그 안에 드는 게 더 힘들걸”이라고 탄식했다.

기존 규모로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이산가족 상봉
경쟁률 500:1

 

대한적십자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은 지난 2000년부터 현재까지 총 15차례 이뤄졌으며 규모는 4120건(방남 상봉 301건, 방북 상봉 3819건)이다. 이산가족 신청자는 지난 4월 30일 기준 13만1896명이다. 남북 각 100명씩 상봉한다면 약 500:1의 경쟁률인 셈이다.

남북 정상이 지난 4월 27일 1차 남북정상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합의했음에도 정작 이들이 큰 기대를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대와 좌절이 지난 20년간 수없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맹 씨는 “8·15 상봉에 큰 기대는 안 한다. 명절 전 100명 상봉하는 것만으로는 200년 걸려도 다 못 만난다. 이산가족 문제는 인권 차원에서 다뤄져야 한다”며 “이산가족 1세대들은 살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다”고 호소했다.

실제 대한적십자사 관계자에 따르면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1896명 중 7만4772명은 사망했다.

지난 1971년 남북 적십자회담 당시 대표단에 종사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최은범 일천만이산가족위원회 고문은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은 첫 남북 적십자회담이 이뤄졌을 때만큼 감격스러웠다”라고 전했다.

지난 1948년 11월 8일. 그가 서울에 도착한 날이다.

그의 집안은 고향인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둔전리에서 지주층에 속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지난 1964년 토지개혁을 단행하자 집안의 농작물과 농기구, 가옥 등까지 몰수당했다.

게다가 ‘3일 이내에 다른 군으로 떠나라’는 명령에 부모와 형 등은 선조들의 위패와 식량을 싣고 성진시(현재 김책시)로 향했다.

이는 실향의 출발이었다. 형과 형수는 탄압을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월남했다. 이후 서울에서 자리를 잡게 된 형은 북에 남은 가족들을 데려오기 위해 형수를 보냈다.

하지만 38선을 넘어 형네 집에 도착한 것은 그와 여동생 둘뿐이었다. 어머니도 보따리 장사꾼을 따라 내려왔지만 고아인 외손녀가 북에 남아 있다며 다시 월북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유학자였던 아버지는 11명 선조의 위패를 지킨다며 내려오지 못했다. 최 고문은 “문화적인 문제지만 당시 냉철하지 못하셨던 부모님이 한때는 원망스러웠다. 천수를 사셨다가 돌아가셨으리라 믿는다”라고 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대한적십자사에 입사했다. 평양에서 이뤄졌던 남북 적십자회담에 참여했을 당시 최 고문은 가족을 찾을 기회가 있었지만 시도조차 못했다.

‘개인적으로 가족을 찾지 마라’는 적십자회담 사무국의 내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중국·대만 사례 따라
가족 방문·서신 교환 가능해야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던 그는 2박 3일간의 짧은 만남은 새로운 인도주의적 문제를 조성한다고 꼬집었다. 최 고문은 “저녁에 만나서 부둥켜 안고 따로 잠자리에 든다. 다음 날 점심 즈음에 다시 만나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한다. 그 다음 날 헤어지는 거다”라며 “서로 주소 확인도 못하게 돼 있다. 만나고 온 사람들은 차라리 안 만나느니만 못하다고 하더라. 헤어진 이후 단절된 소식에 더 비참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두 정상이 지난 1980년대 국제적십자사가 만들어놓은 절차에 의해 진행됐던 중국·대만 이산가족 교류를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만 정부는 지난 1987년 중국에 있는 이산가족들을 만날 수 있도록 가족 방문을 허용했다. 중국과 대만이 대화의 물꼬를 트게 된 시점이다.

특히 중국 정부는 지난 1984년 “1국가 2체제(一國兩制)” 방식에 의한 통일방침 발표 이후 무력을 통한 대만 해방을 포기하고 양안 화해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바 있다.

당시 두 국가는 서신 교환도 가능했으며 이산가족 상봉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엔 인적 왕래와 투자, 기업교류 등이 이뤄졌다.

이에 대해 그는 “그간 2차 세계 대전 등 크고 작은 전쟁이 세계에서 일어났지만 같은 동족끼리 서신도 주고받지 못한 곳은 없었다. 남북 이산가족 문제 관련 국제협약에 따르면 남북 이산가족은 안부의 지장, 가족적 사항만을 기재할 수 있는 ‘가정통신’ 형식에 맞춰 서신을 작성할 수 있으며 이를 교환할 수 있다”며 “환상적으로 없는 제조를 하자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두 정상의 의지에 달렸다고 볼 수 있다”라고 토로했다.

아울러 최 고문은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도 중요하지만 전면적인 생사 확인부터 이뤄져야 한다면서 “정부 측에선 하나의 이벤트일지 모르겠다. 의례적인 행사로서 정부의 업적으로만 남기려 하지 말고 민족적 견제, 인류적 견제에서 이 문제를 통 크게 해결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악독한 민족이었다는 오점을 역사에 남기지 않으려면 말이다”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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