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사고의 집적이 발아하는 것, 그것이 시다”

'사랑굿' 김초혜 시인.

[일요서울 | 권가림 기자] 김초혜 시인은 1980년대 ‘사랑굿’ 시편으로 뭇사람들의 가슴앓이를 시켰던 베스트셀러 작가다. 그의 시 ‘어머니’는 국정 교과서에 실리기도 한 바 있어 글을 깨친 사람이라면 누구든 ‘김초혜 시인’의 이름이 낯설진 않을 것이다. 시인에게도 청춘은 흘러 이제 노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지난해 발간된 ‘멀고 먼 길’이 올해 제26회 공초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며 시는 늙지 않는 다는 것을 입증했다. 기자는 지난 5일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 있는 김 시인 자택을 찾았다.


- ‘동국문학회’ 최초 여성 회장…100만 권 훌쩍 넘긴 베스트셀러 작가로


김초혜 시인은 청주여고 문예반 반장을 맡게 되며 자신을 시인이라 생각했다. 중학교 백일장 심사를 도맡고 교지에 권두시를 쓰며 자신감이 넘쳤기 때문이다.

시는 감성의 문학이라고 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감성이 시를 쓰게 한 것 같다고 전했다. 김 시인은 “꽃이 피는 것, 구름이 흘러가는 것, 새소리와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것을 글로 옮겼다. 아마도 그런 것을 시심이라고 하나보다”며 “그러한 감성의 흐름이 계속돼 시인의 길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라고 시인이 된 계기를 밝혔다.

이후 김 시인은 동국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미당 서정주 선생이 그의 특출한 글솜씨를 보고 이내 국문과로 전과시켰다.

김 시인은 전과한 뒤 얼마 안 돼 ‘동국문학회’ 회장 선거에서 당선됐다. 최초의 여성 회장이었다.

다음날 워커를 신고 검게 물들인 군복을 입은 한 학생이 그에게 다가와 “왜 나는 빵(회장 턱) 안 사주느냐”라고 물었다.
이에 김 시인은 “어제 왔으면 먹었지”라고 하자 “지금 사줘”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문호 조정래와의 첫 만남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1967년 1월 결혼식을 올렸다. 올해로 결혼 51주년을 맞은 지금도 여전히 금실 좋은 부부로 통한다. 그는 “이 세상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살고 있다. 그중에서 두 사람이 맺어진 것이 부부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짧은데 다툴 여유가 어디 있겠느냐”며 “행복을 향휴하려면 함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가야 한다”라고 잉꼬부부의 비결을 밝혔다. 

이들 부부는 종종 인생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문학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부부 문학인다운 대목이다.
 

나무서 열매 맺는 것처럼
시인도 사고의 회전 필요
 


대학생들과 전경이 대치하는 거리 곳곳의 최루탄 가스 자욱한 풍경은 1980년대의 일상이었다.

김 시인은 의문사 눈물로 얼룩지던 시절을 겪으며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가늠했다고 한다. 역사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불의와 대결한 흔적으로 미래의 거울이 될 수 있는 지혜로운 의지라고 했다.

그는 민생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로해 줄 시를 생각해냈다.

시대의 명작 ‘사랑굿’ 시리즈의 탄생기다.

‘사랑굿’은 이성과의 사귐을 가진 계층들이 읽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어느 날 TV 화면에 구로공단 여공들의 방이 비쳤는데 그 벽면에 ‘사랑굿’ 한 편이 붙어 있었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대학의 대자보에도 ‘사랑굿 21’이 쓰여 있었다.

그는 당시 이런 장면들을 목격하면서 “저렇게 어려운 상황에 지친 이들조차 시를 알고 위안을 받는구나”싶어 모든 사람을 어우를 수 있는 시인이 되겠다고 한 번 더 다짐했다.

모든 시인은 시를 쓰면서 매일 절망한다고 한다. 창작은 그만큼 감내하기 힘든 고통이기도 하다. 김 시인도 등단한 지 올해로 54년째지만 여전히 시를 쓰는 일은 보통이 아니라고 털어놨다. 

그는 “시적 감성은 자연의 순환과도 같은 것이다. 나무에서 꽃이 되고 잎이 돋아나고 열매를 맺는다. 그렇게 해서 잎이 떨어지고 또 새봄과 함께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시인의 영혼도 끝없이 사고의 회전을 하며 시를 꽃피워 내는 것이다”면서 “흔히 말하는 시적 영감이라는 것이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아니다. 깊은 사고의 집적이 어느 순간 발아하는 것, 그것이 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깊은 사고를 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손자에게 365일 편지 써
죽음·절제·역사의식 가르쳐

 

김 시인에게는 창작의 기쁨보다 더한 행복이 있다. 바로 그의 손자다.

실제 그의 방과 조 작가의 방, 거실엔 돌 사진부터 어엿한 고등학생으로 자란 손자 사진이 가득했다.

김 시인은 첫째 손자를 위해 1년 365일 꼬박 ‘연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김 시인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오빠에게 받은 톨스토이의 ‘인생독본’ 같은 선물을 손자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재면아!’로 시작하는 일기 같은 편지는 2008년 1월 1일 시작해 같은 해 12월 31일 ‘할머니가’로 마친다.

칠십 평생을 살아온 인생 선배이자 큰 어른으로서 체득한 세상의 지혜를 들려주고 싶었다.

김 시인의 충고는 실제적이다.

축복만을 쏟아내지 않았다. 험한 세상을 견뎌야 할 손자를 걱정하면서도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이제 갓 초등학교를 졸업한 손자에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도 전했다. 그는 책에서 “아침에 일어나 활동을 하고 밤이 되면 휴식을 위해 잠을 자듯이 이 세상에 와서 많은 일을 하고 인생의 끝자락에서 깊은 잠에 드는 것이 죽음이다. 밤이 돼 잠을 자는 할머니를 슬퍼하지 않았듯이 영원히 깊은 잠에 든 할머니의 부재를 슬퍼하지 말아라”라고 전한다.

김 시인은 자체 제작한 가죽 노트 5권에 편지를 간직해 오다 손자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선물로 줬다.

이를 받은 손자는 2014년 중2부터 2016년 고1까지 눈코 뜰 새 없는 학창 생활 와중에 짬짬이 할머니에게 답장을 적었다.

손자의 3년 치 일기와 할머니의 일기를 날짜에 맞춰 교차 편집한 것이 지난해 12월 출간된 ‘행복 편지’다.

김 시인 집안에서 가족 간 편지를 쓰는 일은 하나의 문화로 정착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일 때, 입학할 때, 새해에, 크리스마스 때 그리고 삶 속에서 의미 있는 날에 편지를 주고받는다. 편지는 말로 하는 것보다 수백 배 깊은 마음과 따뜻한 정을 자아내는 영혼의 글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그는 전했다. 

김 시인은 하반기 새 소설 집필에 들어가는 조 작가와 함께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 인근에 지어지고 있는 집필실로 거처를 옮겨 집필 활동을 계속할 생각이다.

그는 “내년 시집 출간을 계획하고 있다. 작품을 쓰기 시작하면 거처를 옮기긴 어려워 함께 집필실에 가게 될 것 같다”며 “‘우리는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추상적인 의문에 최소한의 위안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라고 했다.

노년에 이른 시인의 맑은 눈이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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