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네 소년의 포부와 도원결의

간밤에 쏟아진 폭우 탓일까, 아니면 싱그러운 바람 때문일까. 
점심 무렵 개경 북쪽 산성리의 천마산과 성거산은 속살을 드러낸 처녀의 몸매처럼 투명해 보였다. 그 사이를 관통하고 내려온 계곡물은 옥 같은 돌 사이로 흘러 박연폭포를 만들었다. 웅장한 폭포는 남쪽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선 층암절벽에 안기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박연폭포는 폭포 위에 너럭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어 이루어진 ‘박연(朴淵)’이라는 연못이 있으며, 폭포 밑에는 폭포수에 의해 파인 연못인 ‘고모담(姑母潭, 지름 40미터)’이 있고, 고모담 기슭에는 물에 잠겨 윗부분만 보이는 ‘용바위’가 있다. 또한 고모담의 서쪽 기슭에는 ‘범사정(泛斯亭)’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고모담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범사정이 있는 바위 아래로 감돌아 오조천으로 흘러든다. 
최해가 박연폭포의 대단한 광경을 보며 감탄하여 탄성을 질렀다. 
“제현아, 저기 보이는 큰 바위가 박연폭포야!”
구름을 꿰뚫듯이 치솟은 산봉우리 위에서 떨어지는 장엄한 폭포는 힘찬 굉음을 울리며 흩어짐 없이 한 줄기로 힘 있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폭포수는 마치 방아를 찧듯이 까마득한 높이에서 수직으로 낙하하여 용바위를 치고는 사방팔방으로 물보라를 퉁기고 있었는데, 천지를 진동시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가 비 갠 여름 산곡(山谷)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조선의 황진이(黃眞伊)는 <박연폭포>라는 시를 지었는데, 후세 사람들이 용바위에 황진이의 시를 새겨 그녀를 추모했다.
폭포수 백 길 넘어 물소리 우렁차다.
나는 듯 거꾸로 솟아 은하수 같고
성난 폭포 가로 드리우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
어지러운 물방울이 골짜기에 가득하니
구슬 방아에 부서진 옥 허공에 치솟는다.
나그네여, 여산(廬山, 중국 강소성 북부에 위치)을 말하지 말라.
천마산이야말로 해동(海東)에서 으뜸인 것을.
네 소년은 폭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라보고 ‘쏴아’ 하는 엄청난 굉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막혀 있던 마음이 뻥 뚫리고 삼복더위가 몽땅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안축이 박충좌에게 말했다.
“충좌야, 너는 박연폭포에 얽힌 전설을 알고 있니?”
“아버님으로부터 들었는데, 옛날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어느 날 밤에 박진사(朴進士)라는 총각이 용바위에 앉아 피리를 불자 못 안의 용녀(龍女)가 피리소리에 반해 그를 홀려서 백년가약을 맺었는데, 박진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아들이 폭포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생각하고 비탄에 빠져 자신도 담(潭, 못)에 빠져 죽었대. 이때부터 이 담을 ‘고모담’이라 하고, 박진사의 이름을 따서 ‘박연폭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해.”
“박진사의 어머니가 불쌍해서 어쩌지?”
“전설이니까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어.”
박연폭포의 절경에 매료된 소년들은 얼음같이 차가운 폭포에 발을 담그고, 동시다발로 울려 퍼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누워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박연폭포 너머 구름을 헤치고 새처럼 날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동안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소년들은 시장기가 엄습해오자 범사정으로 자리를 옮겨 그늘 아래서 어머니가 정성스레 싸준 주먹밥과 장떡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리고 어른 키로 20배가 넘는 천하절경의 풍취에 취해 힘든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먼저 이제현이 말문을 열었다.
“제갈량은 자신의 재능을 공자, 맹자, 순자, 한비자에 비유한 것이 아니라 관중(管仲, 제나라의 명재상)과 악의(樂毅, 연나라의 명장)에 비교했지만, 나는 최치원(崔致遠)선생 같은 인물이 되고 싶어. 왜냐하면 선생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중국에 들어가 문장으로 이름을 세계에 떨쳤고,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선생으로 이어져 고려의 정치이념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야.”
이어 박충좌도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했다.
“나는 거란의 80만 대군이 고려를 침공했을 때 적장 소손녕과 담판하여 강동6주 280리를 차지해 ‘말 한마디가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한 서희 장군의 기개와 지혜를 배우고 싶어.” 
안축과 최해는 각각 이규보와 이인로를 닮고 싶다고 했다.
“이규보(李奎報) 선생은 사대주의에 물든 일반 유학자와는 달리 약관 25세에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읊어서 우리 민족의 높은 긍지를 세우고 백성들에게 자부심을 안겨 주었어.”
“이인로(李仁老)선생은 추악하기 그지없는 무인정권에 굴복하여 관리로 출세하는 길을 버리고 진나라의 죽림칠현에 비견되는 해좌칠현(海左七賢)의 길을 걸었어.”
이렇듯 자신들의 포부를 피력한 네 소년은 박연폭포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과 천지신명께 기도하면서, 이렇게 맹세를 했다.
‘이 자리에 모인 네 명은 한결같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고, 서로 간에 신의를 지켜 고려의 부국강병을 끊임없이 도모할 것입니다. 오늘의 이 맹세를 배반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힘을 하나로 모을 것입니다.’

부소대사의 가르침

60리 길을 쉬지 않고 걸어온 까닭일까. 
네 소년은 소나무 그늘 아래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다 모두 깜빡 잠에 빠졌다. 피곤이 엄습한 탓일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날씨는 멀쩡한데, 검은 구름이 지나가며 가는 빗방울을 몇 줄기 뿌렸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문득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얘들아! 소나기가 몰려올지도 모른다. 그만 일어 나거라…….”
네 소년이 눈을 떠 보니 난데없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자신들을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우리가 잠이 들었던 모양이죠.”
네 소년은 비몽사몽간에 반사적으로 일어나 앉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너희들이 어떻게나 곤하게 자고 있는지, 오랫동안 너희들의 얼굴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저러나 너희들은 어디서들 왔느냐?”
“개경에서 왔습니다. 저희들은 모두 권부 학당의 문생입니다.”
그러자 노인은 어른 엄지손가락 두개만한 굵기의 싸리나무 네 개를 칡덩굴로 얼기설기 묶은 뭉치를 소년들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너희들 중 누가 이 싸리나무 뭉치를 부러뜨릴 수 있겠느냐?”
네 소년은 교대로 젖 먹은 힘까지 다 내어 싸리나무 뭉치를 꺾어 보려고 했지만, 아무도 꺾을 수 없었다. 그러자 노인은 껄껄 웃으면서 싸리나무를 묶었던 칡덩굴을 풀어서 싸리나무 네 개를 각각 네 소년에게 하나씩 건네면서 다시 말했다.
“너희들 모두 이 싸리나무를 하나씩 부러뜨려 봐라.”
네 소년은 모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싸리나무를 꺾을 수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노인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들이 힘을 합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느니라.” 
네 소년은 노인이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노인이 말한 깊은 뜻이 어디에 있을까를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노인은 걱정스런 얼굴을 하며 말했다.
“자, 갈 길이 멀고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지고 있으니 빨리 서둘러 개경으로 돌아가거라. 이곳은 산세가 험하기 때문에 가끔 도적들이 출몰하곤 한단다. 만약 도중에 도적들을 만나게 되면 절대 당황해서는 안 된다. 반드시 산채까지 가서 산적 두령을 만나서 풀어 달라고 해라.”
“예, 알겠습니다.”
네 소년은 고개를 깊이 숙여 감사의 인사를 하고 나서 얼굴을 들어보니, 노인은 축지법(縮地法)을 썼는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귀신에 홀린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노인을 찾았지만, 노인의 족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적들이 출몰한다’는 노인의 소리에 덜컥 겁이 났지만, ‘산적 두령에게 방면을 요청하라’는 노인의 충고가 왠지 마음 든든하게 느껴졌다. 
네 소년은 부랴부랴 봇짐을 꾸려 박연폭포를 떠나 개경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 중 박충좌가 서쪽으로 쑥 기울어진 해를 쳐다보며 말했다.
“날이 벌써 많이 저물었어. 숲 속에 호랑이나 승냥이 같은 짐승이 많아서 밤길이 위험하니 빨리 걸어야 할 거야.” 

산적들에게 붙잡혔다가 풀려나는 신동들

천마산과 성거산은 도적떼가 자주 출몰하여 인근 관아에서도 골치를 앓고 있었다. 산세가 험하고 수풀이 울창하여 인적이 드문 곳이기 때문이었다. 네 소년이 가파른 산마루를 넘어 좁은 오솔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저만치 숲가에 허리에 칼을 두어 자루씩 찬 네댓 명의 괴한이 불쑥 나타났다. 
“이크! 저 사람들이 누구지?”
“글쎄, 산 도적이 아닐까?”
네 소년은 모두들 겁이 덜컥 나서 몸을 웅크렸다. 뒤쪽을 돌아보니 높은 오르막길이고 동쪽 비탈은 막혀있고 서쪽 비탈은 여남은 발자국만 내려가면 그 아래로 수십 길 깎아지른 벼랑이 이어지는 산세였다. 그야말로 진퇴유곡(進退維谷)이어서 도망갈 엄두를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놈들, 꼼짝 말고 게 섰거라.” 
“아니, 누구세요. 왜 남의 앞길을 막는 거예요?”  
이제현이 당돌하게 따져보았지만, 거한들은 거칠게 소년들을 몰아세우며 다그쳤다.
“조그만 녀석이 잔말이 많구나. 살고 싶으면 입 닥치거라.”
괴한들은 소년들의 괴나리봇짐을 뒤져보고 돈 될 만한 것이 없자 다짜고짜 입에 재갈을 물리고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렸다. 
괴한 중 한 명이 다른 괴한들에게 말했다.
“이 놈들이 가진 것도 없고, 살려서 보내면 우리의 정체가 드러나 후환이 두려우니 차라리 서쪽 벼랑에 밀어 넣어 버리는 것이 어떨까?”
다른 한 명의 괴한이 이에 제동을 걸었다.
“아무리 그래도 꽃도 피워보지 못한 어린애들인데, 너무 불쌍하지 않나…….”
이 때 이제현은 조금 전에 노인이 한 말이 생각나서 의연한 모습으로 말했다.
“우리 목숨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호걸(豪傑)님들 마음에 달려있으나, 그래도 우리가 죽기 전에 두령님을 한 번 뵐 수 있도록 해주세요.” 
이제현의 말이 당돌하지만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괴한들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네 소년을 끌고 산채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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