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한 경영실적을 낸 전문 경영인이 옷을 벗었다. 그 주인공은 황건호 메리츠증권 사장. 메리츠증권은 지난 15일 황건호 사장이 사표를 제출해 물러났다고 밝혔다. 황사장의 퇴진은 대주주인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의 삼남인 조정호 메리츠증권 부회장과의 경영노선에 대한 견해차에 따른 갈등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츠증권은 지난 17일 이사회를 열어 황건호 사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신임 대표이사에 비상근 이사인 클리프 엘 청(Cliff L. Cheung)씨(42)를 임명했다. 또 메리츠증권은 황사장의 사직에 항의성(?) 사표를 제출한 백기언 리서치센터장과 소매영업 총괄 박광준 전무, 자산운용 본부장인 황인경 상무, 법인영업 총괄 김명관 상무 등 임원들의 사표도 함께 수리했다.

메리츠증권은 이어 새 임원진으로 주식운용팀 윤중헌 팀장이 이사로 승진 발탁했으며, 자산운용 사업본부장에는 메리츠 투자자문 정해영 감사가 기용됐다. 당산컨설팅과 유클릭 감사를 역임했던 장수연 이사도 새 경영진에 합류시켰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경영진의 교체로 메리츠증권은 향후 경영공백이 우려된다는 시각이 나온다. 이번에 함께 퇴진한 임원들은 황사장 부임 당시 대우증권에서 이동해온 인사들인데다 주요 보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이번에 중도 하차한 황건호 사장은 지난 99년 대우증권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중 한진투자증권(현 메리츠증권) 대표이사로 스카우트됐다. 황사장은 지난 76년 대우증권에 입사, 증권업계에 몸을 담아온 전형적인 증권맨 출신이다. 황사장은 지난해 주주들의 신임 속에 연임에 성공, 올해로 4년째 메리츠증권의 사령탑을 맡았다.

그러나 임기를 2년여 남겨둔 상황에서 황사장의 돌연 사퇴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만큼 황사장의 업무능력이 검증받은 터라 그의 퇴진은 ‘의외’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대부분 증권사들이 침체일로인 상태에서 메리츠증권은 올 상반기에만 776억원의 영업수익을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작년 동기 대비 약 5%포인트 증가한 수치로 증권업계의 전반적인 침체를 감안하면 돋보이는 경영성과다. 이익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중소증권사로서는 드물게 수익구조 다변화에 성공했기 때문이라는 게 증권업계의 시각. 메리츠증권의 수익구조는 위탁업무에 치중하는 다른 증권사와 차별화된다. 메리츠증권은 올 상반기 기업 인수 및 주선업무(M&A)에서 약 302억원의 이익을 냈는가 하면, 주식매매 및 평가이익 분야에서도 각각 전년 대비 31%, 58% 등 높은 성장세를 나타냈다.

이 때문에 부동산금융, 인수 및 주선업무 등 특화된 사업에서 경쟁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사를 경쟁력있는 중소형사로 알차게 키운 황사장을 사지(?)로 몰고 간 것은 외부 경영컨설팅 결과, 황사장의 경영방향과 상반된 결론으로 나왔기 때문. 황사장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부동산리츠와 기업 인수 및 주선 업무 등 사업 다각화를 통한 수익 증대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대주주인 조정호 부회장은 컨설팅 결과에 주목, 황사장에게 이를 따를 것을 권유하는 등 이견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츠증권 관계자는 “메리츠증권은 경영전략을 수립하기 위해 최근 B사로부터 경영컨설팅을 받았고 컨설팅 결과가 황건호 사장의 경영방식과 상반되게 결론이 나자 황사장이 대주주인 조정호 회장에게 사의를 표명했다”며 컨설팅 결과에 대한 대주주와 황사장간의 견해차가 직접적인 원인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컨설팅 결과는 기업 인수 등 황사장이 주력했던 사업 부문을 축소하거나 아예 폐지하는 쪽으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메리츠증권 측은 “컨설팅 결과를 외부에 공개하지 않고 내부적으로 참고하는 것이어서 자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다”며 “대략적인 개요는 황사장의 경영방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점만 전했다. 그러나 컨설팅 결과 황사장이 사직했다는 메리츠증권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재계에선 그 배경을 두고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대주주가 컨설팅이 참고용에 불과한데도 컨설팅 결과에 따라 경영방향을 정하려고 하니 황사장 입장에서 대주주의 의도를 달리 해석할 소지도 있었다”고 전했다. 따라서 황사장은 증권업계의 침체 상황에서 효자 노릇을 해온 사업분야를 축소하거나 폐지를 권고한 컨설팅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했으며, 이를 사직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증권업계 일각에선 황사장의 사퇴 배경이 따로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증권업계에 따르면 메리츠증권 대주주가 한진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된 동양화재와 메리츠증권을 금융그룹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외부에서 영입한 황건호 사장보다는 내부 인맥을 배치하려는 포석에서 황사장을 밀어낸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 것. 실제 메리츠증권의 조정호 부회장은 동양화재 비상근 이사로 등재돼 있으며, 동양화재 사외이사로 등재한 김현 유클릭 사장이 신임 사장으로 거명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근거없는 얘기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황사장의 사퇴와 관련, “중소형 수익 구조를 감안할 때 성공적인 모델을 제시한 황사장의 중도하차를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대주주가 의지가 있었다면 사표를 반려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보니 애초부터 딴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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