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명예회장 “현정은 회장 경영능력 지켜볼 것”현대그룹 ‘가신경영 척결’ 위한 사전 포석 해석도 나와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이 말은 역설적으로 피 한방울 섞이지 않으면 물처럼 금방 풀어지거나 그보다 못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현대그룹 경영권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정은 회장 일가와 정상영 금강고려화학(KCC) 명예회장 일가의 대립양상은 속담의 역설을 보는 것 같다. 최근 경영권 분쟁 국면은 정점으로 치닫기 직전 정상영 명예회장이 지분 매집에 관한 해명에 나섬으로써 ‘휴전’ 상태에 들어갔다. 그러나 현대그룹 경영권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정 명예회장이 “현정은 회장의 경영 능력을 지켜보겠다”는 뉘앙스의 말로 경영진 교체의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신한BNP파리바투신 운용이 현대그룹의 지주회사라 할 수 있는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집중 매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촉발된 정-현씨 일가의 대립은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고 정몽헌 회장 자살 직후 정상영 명예회장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할 때부터 그 진의에 대해서는 온갖 설이 구구했다.

그러나 당시의 현상만으로 정 명예회장의 지분 매입을 적대적 M&A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혈족은 아니지만 두 집안이 한 다리 건너 사돈간이고 김문희 여사에 비해 정상영 명예회장의 지분이 다소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때가 8월이었다.그런데 11월이 되자 현대그룹은 또 다시 M&A 위협에 술렁거렸다. 정체가 불분명한 사모펀드가 대주주로 등극하며 경영권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펀드는 11월5일 현재까지 12.82% 지분을 매입했다. 이는 현정은 회장이 김문희 여사로부터 위임받은 의결권 지분 18.57%에 근접하는 수준이다.막상 표 대결에 들어가면 현 회장측 의결권은 지금보다 강력해진다. 의결권 향배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현대증권 지분 4.88%만 보태도 현 회장은 23.45%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정도면 경영권을 지켜낼 수 있는 수준.

그러나 정상영 명예회장측은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해 KCC 보유분 7.5%에 사모펀드 12.82%, 친족 보유분 등을 모두 더하면 36.52%에 달한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임시주총을 소집해 경영진을 갈아치울 수 있는 막강한 지분이다. 바야흐로 고 정주영 창업주로부터 정통성을 물려받은 현대그룹이 창업주의 형제 손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에 몰린 것.그럼에도 정 명예회장의 정확한 의중은 지금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단지 정황에 따른 유추와 이에 대한 사실 확인에 불과한 수준이다. KCC가 지난 9일 배포한 ‘현대엘리베이터에 대한 KCC의 공식입장’이 기자들에게는 이미 익숙한 해명쯤으로 여겨졌던 것도 저간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그렇다고 정 명예회장의 진의를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보도자료가 정 명예회장과 인터뷰 하에 작성된 것이라는 KCC측 관계자의 말을 놓고 보면 근거는 더욱 굳어진다.

정 명예회장은 KCC의 입을 빌려 보도자료에서 “현 회장이 올바르고 투명하게 회사경영에 ‘임한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문구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부분은 ‘임한다면’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정 명예회장이 직접 경영에 나설 수도 있다는 다중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정 명예회장이 현씨 일가를 상대로 경영권 분쟁에 돌입할 거라는 세간의 의혹이 일고 있는 가운데 정 명예회장이 이와 같은 단서를 붙인 것은 경영진 교체의 사전 포석이라는 시각도 있다. 현대그룹 계열사의 한 관계자는 “정 명예회장이 현정은 회장 체제를 바꾸는데 단지 시간차만 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일부에서는 정 명예회장의 진짜 표적은 현정은 회장 일가가 아니라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 강명구 현대택배 회장 등 그룹 핵심 경영진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정 명예회장은 현대의 몰락이 가신(家臣)들의 싸움 때문이라고 보고 현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인적 청산은 필수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이같은 세간의 의혹에 대해 KCC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회사 입장에서도 정 명예회장의 의중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난 8월에는 고 정몽헌 회장이 정상영 명예회장에게 돈을 빌리며 담보로 맡긴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놓고 회사와 오너의 주장이 엇갈리는 일도 있었다. 이때 KCC는 정 명예회장이 의결권 행사를 통해 현대그룹 경영에 관여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이날 오후 “정 명예회장이 관련 내용을 부인했다”며 말을 바꾸기도 했다. 그만큼 정상영 명예회장이 깊은 속내를 내비치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KCC측 관계자는 그러나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대그룹 경영권을 지키려는 차원에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매입한 것으로 안다”며 “의도의 순수성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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