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난이에게.
그대에게 괴로운 심정을 호소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소. 그대를 만난 순간부터 내 운명은 결정되었소. 나는 당당하게 그대의 남편이 되고 싶소. 아니 될 수 없다면 그대의 종이라도 될 것이오. 그 길은 등과를 하는 일이라 생각하오. 소년등과(少年登科)가 모든 성공을 보장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것을 스승님께 배웠지만, 나는 일찍 등과를 하고 싶소. 그 이유는 그대 곁으로 하루라도 빨리 가기 위함이오.
그런 까닭으로 내가 꿈을 이룰 때까지 우리의 만남을 중지하는 게 어떨까 하오. 일 년이 걸릴지 이삼 년이 걸릴지 아니면 십 년 세월을 보내야 할지 모르지만,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칠월칠석날 해마다 단 한 번 뿐인 만남을 갖는다는 설화처럼 우리도 그 때까지 참으며 기다립시다. 내 꼭 약조를 지킬 것이오.
경자년 칠월 칠일. 익재 이제현 씀.

서찰을 보낸 이제현은 마음이 저미도록 아팠다. 일방적인 만남의 중단을 난이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자신이 내린 결정이 과연 옳다고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모든 상념들이 이제현의 뇌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틀 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이제현에게 난이로부터 짤막한 답신이 왔다.

보고 싶은 도련님께
저의 운명이 도련님을 만나 가녀린 초승달에서 활짝 열린 보름달로 바뀌었어요. 도련님 앞에서 저는 사랑에 벅찬 나머지 뭐라고 말을 할지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다만 매일매일 도련님에게 적합한 사람이 되려고 부덕(婦德)을 쌓아가고 있답니다. 어둠은 우리 앞에서 뒷걸음질을 치고 아침마다 저는 기쁨에 충만하여 잠에서 깬답니다. 그리고 저는 온종일 도련님의 성공만을 기도하고 지낸답니다. 간밤에 저는 도련님과 혼인하는 꿈을 꾸었어요.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죽음 외에는.
경자년 칠월 구일. 권난 드림.

15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장원 급제,
그리고 결혼

1300년(충렬왕26) 8월 어느 날, 권부학당의 문도(門徒)들이 귀법사(歸法寺) 승방(僧房)을 빌려 여름공부(夏科하과)를 하고 있었다. 이날은 권부학당 선배 가운데 과거에 급제하고 미처 임관되지 않은 자 중에서 선발된 교도(敎導)가 특별지도를 베풀었다.
특별지도가 끝난 후 ‘각촉부시(刻燭賦詩)’시합이 벌어졌다. 각촉부시는 촛불을 켜놓고 초가 타내려 가는 일정 부분에 금을 새겨 놓아 그 시간 안에 시를 짓게 하는 일종의 시짓기 속작시합(速作試合)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과거종목인 제술과(製述科)에서 부과한 시·부(賦)에 대한 작문 능력은 당시 지식인이라면 필수적으로 닦아 두어야 하는 기초 교양이었다.
촛불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승방 안에 있는 문도들의 긴장된 얼굴에는 어느덧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따금 긴 탄식에 이은 한숨 소리만 들릴 뿐 모두 손끝에 힘을 주고 붓을 빠르게 놀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의 이제현도 승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면서 시구를 짜내고 있었다. 이윽고 아직 초가 반쯤 남아 있을 때, 그는 일어나 자신의 답안지를 제출하고 밖으로 나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시험관이 제일 먼저 방을 붙인 것은 이제현의 작품이었다. 일등은 역시 이제현이었고 모두들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 때 의식이 얼마나 질서정연하였는지 보는 이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이윽고 작은 연회가 벌어졌다. 나이 어린 문도들이 좌우에 열을 지어 앉았고 술과 안주를 바쳤는데, 모두 들어가고 물러남에 예의가 바르고 연장자와 연소자 간의 서열이 분명하였다. 이날 연회는 하루 종일 서로 잔을 주고받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오기 전에 시가를 읊고 헤어졌다.
1301년(충렬왕27) 3월. 과거시험 날이었다.
여기는 개경 만월대. 동이 트기 전에 지공거는 북쪽 의자에 앉아 남쪽을 향하고, 동지공거는 서쪽 의자에 앉아 동쪽을 향했다. 감찰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고 와서 남쪽의 조금 서쪽에서 동쪽을 윗자리로 하고 북향하여 앉고, 장교(將校)는 깃발을 들고 층계 아래 나누어 서 있었다.
만월대 뜰에는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 과거시험에 응시하고 있었다. 불혹을 훌쩍 넘긴 연장자들이 있는가 하면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청년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어디선가 과장(科場) 한 구석에서 나지막이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노형, 저 코흘리개 소년도 시험을 보러 왔소?”
“아니 그럼 이 과장(科場)에 선보이러 왔겠소?”
“저 아이보다 우린 나이를 너무 많이 먹지 않았소.”
“그러니 어쩌겠소. 다 팔자소관이 아니겠소. 나는 그동안 과거 낙방만 일곱 번이나 했는데…….”
“노형, 칠전팔기란 말도 있지 않소. 우리도 한 번 힘내봅시다.”
늙수레한 선비들은 이제현을 부럽고도 신기한 눈으로 흘겨보고 시험 볼 차비를 했다.
이윽고 지공거가 나와 시제(詩題)를 현제판(懸題版, 과거 보는 곳에 글제를 내걸던 판)에 걸자 경향 각지에서 운집한 선비들은 재간껏 글을 지어 바치느라 동분서주했다.
15세의 어린 이제현은 얼른 글귀를 골라 답안지를 쓰고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제일 먼저 답안지를 제출하고 과장(科場) 밖으로 나왔다.
이제현은 권부학당에서 연마한 학문적 소양과 각촉부시에서 닦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응시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재능을 자부하며 서로 우열을 다투었으나, 이제현이 지은 글에 대해 듣고 물러나 움츠리며 감히 앞을 다투지 못하였다.
해가 다 질 승석(僧夕) 무렵에야 등과자의 휘장이 나붙었다.
“장원 이제현!”
설마하고 기대했던 이제현은 자기 눈과 귀를 의심했다.
온 과장(科場) 밖은 장원이 된 이제현에 대한 칭찬으로 자자했다.
“아니 글쎄, 올해 열다섯 살밖에 안 되는 애송이라우.”
“그러게 말이요. 응석이나 부릴 나인데 장원이라니. 고려에 큰 인물이 났구려.”
이제현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성균시에 1등(장원)으로 합격했다. 성균시는 국자감에서 진사를 뽑던 시험으로 최종 고시인 예부시의 예비고시이다. 그해 이제현은 연이어 과거에 급제하였다. 이는 천재 소년이라 불리던 《동명왕편(東明王篇)》의 저자 이규보(李奎報)가 네 번 재수 끝에 22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3세에 예부시에 합격한 사실과 대비할 때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때 과거를 주관한 지공거는 이제현의 스승이자 나중에 장인이 된 권부였으며, 동지공거(지공거의 보좌역)는 조간(趙簡), 성균시의 시관(試官)은 정선(鄭膳)이었다.
이제현은 다른 급제자들과 함께 말을 타고 머리에 어사화를 꽂고 천동(天童)을 앞세워 시가행진을 했다. 이때 악대가 음악을 연주하고 광대가 춤을 추며 재인(才人)이 잡희(雜戱)를 부렸다. 삼일유가(三日遊街)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사흘 동안 시험관과 선배 급제자와 친척을 방문하던 일을 말한다. 이진은 아들을 뽑아준 시관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고, 이어 친척·친지를 불러 문희연(聞喜宴)을 열어 아들의 소년등과를 축하했다. 마지막으로 선배의 집을 찾아다니며 감사를 드리는 회문연(回門宴)이 권부학당에서 열렸다.
동문수학한 선배 문도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익재, 최연소 장원 급제를 경하드리네.”
“저보다 학문이 높은 선배님들이 즐비한데 제가 급제한 것은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게지요.”
듣고 있던 동년배 문도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익재,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과거를 보는 것은 작은 기예(技藝)에 지나지 않네. 그것으로 나의 덕을 크게 기르기에는 부족하네.”
이어 이제현은 선배 문도들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앞으로 부족한 학문을 연마하고 덕을 기르기 위해 정진할 생각입니다. 많은 지도편달과 가르침을 주십시오.”
북송의 대 유학자 정이(程)는 ‘인생삼불행론(人生三不幸論)’을 이야기했다. 그가 강조한 인생의 세 가지 불행이란 어린 시절 과거에 급제하는 소년등과(少年登科), 부모나 형제의 권세가 너무 높은 것,재주가 좋은데 글까지 잘 쓰는 것이다. 일찍 출세하면 교만해질 수 있고,부모형제 잘 만나 스스로 노력을 게을리 할 수 있으며,재주가 많고 문장이 출중하면 안일함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이다. 그리하여 ‘소년등과부득호사(少年登科不得好死)’라 하여 ‘소년등과한 사람치고 좋게 죽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왔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제현은 정이의 ‘인생삼불행론’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이진으로부터 겸양지덕을 배운 이제현은 이처럼 과거급제에 자만하지 않고 겸손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고전을 토론하고 경전을 정밀하게 연구하였으며, 당연함에 이르러서야 절충하였던 것이다.
이런 아들의 학문하는 자세를 전해들은 이진은 ‘하늘이 혹시 우리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려는가’라며 크게 기뻐하였다.
삼일유가를 마무리한 이제현은 지난 1년 동안 꿈속에서조차도 찾아 헤매던 난이를 만났다. 그는 정인의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음이 싸하게 저려 왔다. 그는 바람에 흩날려 마른 입술에 엉겨 붙은 난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난 일 년간 칼날 위를 달리는 심정으로 보냈소. 그 고통과 시름을 견디기 어려울 때는 난이를 생각했소.”
“저도 오매불망(寤寐不忘) 도련님만 생각하며 지냈어요.”
“난이를 향한 불같은 정열이 과거에 빨리 등과한 원동력이 된 것 같소.”
“도련님의 등과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난이, 이젠 말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소. 난 난이와 혼인할 생각이오. 내 청혼을 받아줄 수 있겠소?”
“저는 이미 마음으로 도련님과 동혈(同穴, 부부가 한 무덤에 묻힘)의 벗이 되기로 결심했지만, 아버님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답니다.”
<다음 호에 계속>

우종철 자하문 연구소장  ilyo@ily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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