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
1978년 ‘중국식 개혁개방’ 사회주의 건설 천명
이후 법률·조례·규칙·규정 등 전면 제·개정

 
1949년 10월 1일. 베이징(북경(北京)) 톈안먼(天安門) 광장에는 상쾌한 가을 날씨 속에 아침 6시께부터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광장을 내려다 보는 톈안먼 성루에는 8개의 커다란 홍등(홍등(紅燈))이 내걸렸고, 8폭의 5성홍기(오성홍기(五星紅旗))가 바람에 펄럭였다. 거대한 마오쩌둥(모택동(毛澤東)) 초상화 밑에는 ‘인민의 승리(人民的勝利)’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오후 2시 55분. 중산복 차림의 마오쩌둥이 주더(주덕(朱德)), 류사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신중국 탄생의 산파역들을 거느리고 성루에 올랐다. 광장에 운집한 30만 군중은 환호했다.
 
그리고, 오후 3시. 국가로 정해진 ‘의용군 행진곡’ 연주와 함께 개국대전(開國大典)이 시작됐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감격에 찬 후난(호남(湖南))지방 사투리 어조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성립됐다”고 선포했다.
 
1999년 당시 신중국이 탄생한 지 50년. 죽의 장막이 걷힌 지 20년. 50∼60년대 정치풍파가 잦았던 중국은 10년간 정치적으로 고도의 안정을 구가했다.
 
과거 중국 당국은 매년 6월 4일이 다가오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해 왔으나 1989년 벌어진 톈안먼사태와 같은 대사건은 다시 발생하지 않았다. 97년 2월 제2세대 영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인 충격과 큰 변화는 없었다. 난무했던 권력투쟁설이나 천하대란설은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당시 덩샤오핑 사후 장쩌민(江澤民)과 권력투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던 인물이 바로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전국의회격) 상무위원장이었던 차오스(喬石)였다. 그러나 차오스는 98년 3월 조용히 은퇴했다. 그는 은퇴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다소간의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권력투쟁이 벌어졌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았다.
 
장쩌민 이후의 중국을 떠맡게 될 테크노크라트 위주의 제4세대 지도자그룹도 자연스럽게 부상하고 있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부총리, 쩡칭훙(曾慶紅) 당조직부장 등이 선두주자였다. 건국 50년이 지난 중국은 이처럼 예측 가능한 국가로 변했다. 중국의 안정은 78년 12월의 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차 전체회의(11기3중전회)에서 내려진 개혁·개방의 역사적 결단을 그 뿌리로 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는 4개 기본원칙 견지와 아울러 당의 업무 중심을 경제 건설에 두는 방침이 확정됐다. 이후 20년 동안 중국은 지속적인 경제 발전, 전면적 사회 진보, 종합국력 증대, 국제지위 향상 등 커다란 성취를 이룩함으로써 개혁·개방 방침의 정당성과 선견지명(先見之明)을 보여주었다. 89년 톈안먼사태와 아시아 금융 위기 등의 고비에도 불구, 각 방면에서 이룩한 성취는 중국인들의 자신감, 대국의식, 애국주의로 이어졌다.
 
99년 5월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대사관 폭격사건에 대한 중국인들, 특히 젊은이들의 미국대사관 주변 시위 등 격렬 반응은 관제성을 감안해도 애국심을 웅변해 주었다.
 
‘중국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덩샤오핑의 이론과 방침은 개혁·개방 이후 국가발전의 지침이었다. 목표는 중국을 부강한 대국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덩샤오핑 이론은 97년 9월 15전대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과 나란히 당장(黨章.당헌)에 올라 당의 지도 사상으로 확립됐다.
 
당시 건국 50년의 중국은 정치적 안정 속에 마오쩌둥 시대의 ‘인치(人治)’ 대신 ‘법(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依法治國)’는 개념이 확립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20년동안 수많은 법률과 조례, 규칙, 규정 등이 새로 제정되거나 개정돼 국가정치와 경제·사회생활은 이미 법률의 궤도로 진입했다.
 
전인대가 제정하거나 개정한 법률만도 208건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반적인 법률체계는 아직 초보 단계였다. 당은 15전대에서 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의지를 분명히 함으로써 당의 지도방식과 정권의 운영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당이 모든 것을 영도하는 국가이지만 당과 정부, 전인대, 군부 등과의 관계도 앞으로 법률과 제도에 따르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헌법상으로 보면 의회인 인민대표대회(人大)는 중국 정치체제의 근본 축이고, 전국의회 격인 전인대는 국가 최고권력기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정의 고무도장에 불과했던 인대와 전인대에서 자유토론이 이뤄지고, 인대와 전인대에 의한 당·정에 대한 감시권한도 강화되었다.
 
80년대부터 논의돼 온 정치체제 개혁은 당·정 분리에 의한 권력 재배치가 사회주의체제의 본질적인 수정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아직 당과 정부의 기구개혁, 행정 간소화, 공무원제도 도입 등의 수준에 그치고 있었다.
 
따라서 서방식으로의 정치 개혁은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거제도는 지난 88년 제7기 전인대 및 28개 성·시 인대 대표 선거에 차액선거, 연명추천에 의한 후보 선출 등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향·진급 인대 대표는 유권자 직접선거로 선출하도록 바뀌었다. 중국의 수교국은 50년대 초반까지 구소련,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20개국에 불과했고, 유엔 가입 직전까지도 63개국이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이 시작된 78년 말에는 103개국, 지금은 163개국으로 크게 늘어났다.
 
유엔 상임이사국이라는 국제적 위상, 인구 13억에 육박하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시장으로서의 매력, 급속한 경제성장 등을 배경으로 중국은 이제 국제사회에서 강국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건국 이래 기본적으로 독립·자주원칙과 평화공존을 표방해 온 중국의 외교전략은 시대별로 상당한 변화를 보여왔다.
 
50년대의 ‘양대진영론(兩大陣營論)’에 입각한 친소일변도가 구소련과의 대립으로 현실적 외교전략으로 바뀌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아시아 중시전략이 하나의 큰 줄기를 이뤘다.

세계질서의 미국 중심 재편 경향은 중국이 한국과 동남아 등 아시아와 제3세계와의 제휴를 더 강화하도록 만들었다. 세계의 새로운 정치·경제질서가 미국 중심의 단극화 아닌 다극화로 재편돼야 하고, 유엔의 기능이 강화돼야 한다는 중국의 주장은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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