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과 KCC 금강고려화학의 경영권 분쟁을 둘러싼 신경전이 벼랑끝으로 치닫고 있다. 먼저 포문을 연 측은 KCC. 지난 14일 KCC 측은 ‘현대상선의 해외매각 시도와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했고, 곧바로 현대상선 측이 ‘근거 없는 공격’이라고 반박했다. 한 차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조만간 결정되는 금융당국의 지분처분명령 여부와 오는 3월로 예정된 현대엘리베이터 주주총회를 앞두고 벼랑끝으로 치닫고 있는 ‘막가파식 폭로전’ 속으로 들어가 봤다. KCC의 갑작스런 ‘현대상선 분식회계 및 해외매각 의혹’ 발표는 재계를 당혹케 했다.

지난 14일 KCC는 “현대상선이 자산매입 처리과정에서 분식회계를 했다는 강한 의혹이 있다”며 “이러한 의혹을 밝히기 위해 12일 법원에 ‘회계장부 등 열람 및 등사 가처분 신청’을 했다”고 발표했다. KCC 측은 또 “현대상선 사장이 수억 달러 규모의 전환사채 발행과 현대상선 자사주(12%) 매각을 통해 해외매각을 시도 중”이라며 “이스라엘계 다국적 선박회사인 `조디악’사와 상당부분 매각협상이 진전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KCC는 특히 현대상선 노정익 사장을 정면으로 겨냥, ‘주가 부양을 통해 거액의 스톡옵션을 챙긴 부도덕한 경영자’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은 “사실 무근인 KCC의 주장 때문에 기업 이미지 실추와 주가 하락 등 피해가 심각하다”며 ‘용납할 수 없는 행위’라고 비난했다.현대상선도 KCC측의 발표가 있은 다음날 반박보도문을 통해 “KCC가 ‘악의적인 억측’으로 여론을 호도하고 있다”고 대응했다.

상선 측은 ‘분식회계문제는 적법하게 처리되었다’며 KCC가 ‘권한 밖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일축했다. 또 “자사주 매각은 재무구조 건전화 대책 중 하나로 추진 중인 사항일 뿐, 해외매각과는 무관하다”며 KCC측의 주장이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특히 현대상선은 노정익 사장에 대한 KCC의 언급을 ‘심각한 명예훼손’으로 규정,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KCC가 현대엘리베이터 경영권 장악을 시도하면서 그동안 보여온 불순한 행태를 현대상선에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고 말해, 향후 경영권 방어와 관련해 본격 대응할 방침임을 시사했다. 현대상선의 한 관계자는 “이번 KCC의 주장은 현정은 회장과 노정익 사장을 갈라놓으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며 “오는 3월에 있을 현대엘리베이터 주주총회를 염두에 두고, 그룹 이미지를 손상시키려는 의도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현대그룹 관계자는 “그동안 조카며느리의 경영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도덕적 비난이 집중되어있던 KCC 측이 이런 비난을 불식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저지른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즉 현정은 회장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현대경영진의 도덕성을 공격하는 우회로를 택했다는 주장이다.재계 일각에서는 현정은 회장이 ‘가신그룹 퇴진’이라는 적극적 카드를 내세우자, KCC가 이번엔 현대그룹 사장단의 도덕성 흠집내기에 돌입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번 ‘폭로전’은 KCC측에 다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KCC측이 폭로한 내용에는 ‘추측’ ‘의문’ ‘가능성’ 등의 불확실한 단어들이 난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계 한 관계자는 “두 기업의 분쟁이 어찌되었건, 이런 식의 폭로전은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게 없다”고 꼬집었다.

전반적으로 재계는 현재 불법대선자금과 관련, 국민들의 ‘반기업정서’가 높아진 시점에서, 이 같은 ‘집안싸움’은 소모전이라고 우려하는 분위기다. 양 측 모두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국민들이 보기엔 재벌간 싸움이라고 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특히 계속되는 오너들의 분쟁으로 소액주주 등 애꿎은 사람들만 피해를 보고 있다는 비판도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과 KCC의 현대 엘리베이터 경영권 분쟁은 다음달 금융당국이 결정할 지분처분명령 여부가 중요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금감원은 최근 정 명예회장과 정몽진 KCC회장을 상대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 20.63%를 매입한 목적과 경위를 조사했으며, 곧 제재 여부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다.금감원이 “KCC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매입 과정에서 의사결정에 관여한 사람들도 대부분 조사했다”고 밝힘에 따라, 이번 KCC의 지분 매입과정 조사는 사실상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법률검토가 끝나는 대로 증권선물위원회에 회부될 예정이다. 한편 KCC측의 현대엘리베이터 주식 매입을 맡았던 신한 BNP파리바투신운용이 해당 직원 2명을 징계한 것으로 알려져, 징계원인을 둘러싸고 의구심을 자아내고 있다. 즉 KCC측 스스로 ‘5%룰’을 위반한 것을 인정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만약 금감원이 KCC측에 ‘지분처분 명령’ 이란 중징계를 내린다면, KCC는 20.63%의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모두 처분해야 한다. 따라서 현정은 회장 측은 현대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상당히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다. 반면 가벼운 징계에 그친다면, KCC측이 3월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을 접수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커진다. 현재 현정은 회장 측이 보유한 지분은 32.37%. KCC측이 보유한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은 36.95%. 문제는 13.15%의 범현대가 지분과 17.53%에 이르는 소액주주들의 지분이 어디로 기우느냐이다.

KCC측은 이에 대해 최근 범현대가 지분까지 합쳐 50%가 넘는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현대그룹은 “범현대가가 KCC측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현대자동차와 중공업, 해상화재 등은 현재 공식적으론 이번 경영권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다. 또 현대시멘트의 경우 현정은 회장 쪽을, 반면 현대백화점 등 몇몇 현대가는 KCC측의 손을 들어줬다. 한편, 현정은 회장은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정몽헌 회장 사망 전부터 경영권을 차지하려 했다”고 주장해 향후 정 명예회장 측과 한차례 더 논쟁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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