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이었다.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러 80리 진펄이 펼쳐지는 바람에 수레가 지나갈 수 없었다. 장손무기와 양사도 등이 1만 명의 군사들에게 나무와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왔다. 당태종은 원정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제현은 당태종이 이처럼 험난한 길을 택하여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연개소문(淵蓋蘇文) 장군에게 참패를 당하여 도망갈 길조차 선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제현은 당태종으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연개소문 장군이 한없이 자랑스럽고 위대해 보였다. 그러한 기상을 이어받은 후예가 부마국 신하의 신분으로 상국인 원나라의 선진 문물을 배우러 연경으로 가는 현실이 착잡하게 느껴졌다. 
이제현은 마침내 고조선의 도읍지였던 의무려산(醫巫閭山)의 꼭대기에 올랐다. 의무려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 있었으며 흰 바위가 가히 장관이었다. 산꼭대기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그동안 달려온 요동벌과 요서평야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북쪽을 바라보니 파도치는 산의 능선들 너머 눈덮인 몽골 초원이 광활히 전개되고 있었으며, 남쪽을 바라보니 발해만이 눈에 들어왔다. 조각구름은 이제현의 몸을 감싸고 떠 있는데, 손만 뻗으면 푸른 하늘을 잡을 수 있을 듯하였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지평선으로 사라질 무렵 이제현은  역사의 강,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대능하(大凌河)를 건넜다. 대능하부터 임유관(臨楡關) 까지는 줄곧 발해만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다. 임유관은 산과 바다를 여는 관문이라하여 산해관(山海關)이라고도 하였으며 진시황(秦始皇)이 처음 쌓은 만리장성(萬里長城)의 출발점인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 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임유관을 출발하자 거센 북서풍이 한바탕 불어 닥쳤다. 강인한 몽골 말조차 눈보라에 겁을 먹었는지 걸음을 멈추기 일쑤였다. 
이제현은 연경을 향해 말고삐를 죄며 추위에 떨고 있는 조정 관원들을 격려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임유관은 역사의 땅입니다. 수문제가 중국을 통일하고(589년) 고구려에 신하의 예를 강요하는 국서를 보내자,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은 ‘이같이 오만 무례한 글은 붓으로 화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화답할 것이다’며 임유관을 선제공격하여 수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쳤던 ‘임유관 대첩(제1차 고수전쟁, 598년)’의 전승지(戰勝地)입니다. 임유관은 연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니 연경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들을 생각합시다. 그러면 연경길도 가깝게 느껴질 것입니다.”
일행은 이제현의 말을 듣고 힘을 얻어 말고삐를 더 단단히 쥐었다.

연경의 만권당(萬卷堂)에서 7년을 보내다

원의 인종(仁宗)은 원 세조의 외손인 충선왕에게 우승상(右丞相)을 제의했다. 우승상은 황태자가 겸임하는 관직으로서 우승상이 된다는 것은 원나라 조정에서 황제와 황태자 다음으로 높은 서열에 오르는 것이었다. 충선왕의 정치적 비중은 이처럼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그리하여 신유학을 통한 관학(官學)의 정비나 과거제의 부활 등 주요한 국가정책이 충선왕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충선왕은 우승상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태위(太尉, 삼공의 수위)로서 머물러 있도록 해줄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1313년(충선왕5)에 왕위를 충숙왕에게 물려주고, 그 다음해인 1314년(충선왕6) 원나라로 가서 팍스 몽골리아나의 중심이었던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이라는 개인 연구소를 설립했다. 만권당의 설립에는 1298년부터 충선왕을 따라 10여 년간 연경에 머무른 백이정의 역할이 컸다. 
충선왕은 요수(姚遂), 조맹부(趙孟), 염복(閻復), 원명선(元明善), 우집(虞集), 장양호(張養浩), 홍혁(洪革) 등 중국의 대학자들을 만권당에 불러 모아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고, 또 이들을 정치적으로 후원하였다. 충선왕은 만권당을 통해서 원을 비롯한 대륙의 신지식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정치적인 기반을 닦아나가고 고려의 정치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다.
만권당은 일곱 층의 돌계단을 오르면 문이 나서며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아담하고 중후한 누각으로 되어 있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며 고구려의 온돌 구조와 신라의 마루 구조를 계승한 고려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이었다. 당연히 한풍(漢風)이나 몽골풍과는 달라서 연경에서는 보기 드문 명물이 되고도 남았다. 세계의 수도 연경 한복판에 고려의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들어앉아 있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만권당의 정원에는 ‘어은(漁隱)’이라고 불리는 연못이 있었다. 어은은 그 이름에 걸맞게 물고기가 노니는 작은 연못으로 기품이 있었다. 연못을 둘러싼 정원은 사시사철 꽃향기기 물씬 풍기는 작은 선경(仙境)이었다. 정원 내부는 동쪽에 저택, 남쪽에 연회장, 중앙에 주원(主園), 서쪽에 내원(內園), 그리고 북쪽에 서재가 위치하여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서재는 만 권의 책이 있는 집(만권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원나라에서 수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책들이 장서로 소장되어 있었다. 또한 그림을 그리는 화방, 글씨를 쓰는 서방(書房)은 언제나 묵향 냄새가 은은히 풍기고 있었다. 충선왕과 관리들이 거처하는 저택 내부 대청은 고려의 상왕이 거처하는 곳답게 화려했다. 
해가 바뀌어 갑인년(1314, 충숙왕1)이 밝아왔다. 
정월 초아흐렛날, 마침내 이제현 일행은 임유관에서 사하역(沙河驛), 계주(州)를 거쳐 방균(邦均), 연교(燕郊), 노하(潞河)를 지나 마지막 역참인 통주(通州)에 당도했다. 한 달 보름 남짓한 길고 험한 겨울 여정이었다.
통주는 황성으로 들어가는 말죽거리로 그 번영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초입에 들어서자 벌써 거마(車馬)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통주로부터 북경까지 50리 길은 잘 정비된 신작로에 부딪는 쇠바퀴 소리가 귀를 멍멍하게 울렸다.
이제현의 눈이 마침내 휘둥그레졌다. 그는 예상은 했지만 고려 밖의 세계에 크게 놀랐다. 제일 서글픈 일은 ‘대륙은 넓고 반도는 좁다’는 것이었다. 원나라는 광대무변의 위용을 자랑했으나, 왠지 고려는 한없이 작고 왜소해 보였다. 비록 소수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정권이었지만 원나라 문명의 충격은 실로 컸다. 연경성의 동문인 조양문(朝陽門)을 통과하자 화려한 거리 풍경에 놀랐고, 점포에 산적한 상품과 오랜 역사의 골동에 감탄했으며, 문명적인 주민들의 활기찬 모습에 압도당했다. 
마침내 이제현은 연경 중심에 있는 황궁 연춘각(延春閣) 앞에 발을 멈춰 섰다. 높이 솟은 패루와 황금색 기와, 그리고 파도치는 구중궁궐이 이국(異國)의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현은 눈앞에 펼쳐지는 거대한 황궁의 위용에 자기도 모르게 위축되었으나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가슴 밑동에서 용틀임하는 그 어떤 자의식과 결기를 느꼈기 때문일까.
‘나는 연경의 선진 문물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낱 과객(過客)이 아니다. 원나라를 극복하기 위해서 고려에서 온 선각자가 아니던가.’ 
황궁에서 만권당까지 가는 길은 바둑판처럼 잘 정비되어 있었다. 길 좌우에는 양고기, 털옷을 파는 상가와 군고구마를 파는 행상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어린 아들 서종은 연경의 모든 풍물이 신기하기만 했다. 연경 시내를 낙타에 짐을 싣고 이동하는 사람들을 보고 “아버님 저 키 크고 등에 혹 모양을 단 동물은 무엇이에요”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처럼 이제현과 그의 일행의 눈에 비친 연경의 거리는 세계의 수도답게 호화스러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만권당에서 충선왕과의 재회

1314년(충숙왕1) 1월 9일 신시(申時, 15시~17시).
노루꼬리처럼 짧아진 겨울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지고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이었다. 마침내 이제현 일행은 황궁 서남쪽에 위치한 만권당에 당도했다. 실로 한 달 반 이상 걸린 대장정이 막을 내린 것이다. 이제현은 험한 길을 함께 동행해 준 역관, 의원, 호위군관, 마두(馬頭, 역마 일을 맡아 보는 사람)들과도 일일이 감사 인사를 나누었다. 만권당을 지키는 문지기는 고국에서 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제현은 환관에 의해 서재 안의 상왕(충선왕) 집무실로 안내받았다.
이제현은 부복(俯伏)을 하고 충선왕에게 문후(問候)를 여쭈었다.
“상왕 전하, 그간 옥체 만강(萬康)하셨나이까.”
“익재 공, 삼천리가 넘는 노정(路程)에 노고가 많았네.”
“상왕 전하를 알현하게 된다는 기쁨에 일일여삼추(一日如三秋)로 달려왔사옵니다.”  
“해로(海路)로 왔는가?”
“연행길이 초행(初行)이라 원나라의 풍속과 지리도 살필 겸 육로로 왔사옵니다.”
당시 고려에서 원나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였다. 육로는 압록강을 넘어 만리장성의 입구인 임유관을 거쳐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해로는 해성(海城, 지금의 진남포)에서 상선을 이용하여 황해를 건너 산동의 동래(東萊, 지금의 등주)를 거쳐 운하를 이용하여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익재는 연행길에서 무엇을 보고 생각했는가?”
“끝없이 펼쳐진 대륙을 여행하면서 잃어버린 고구려의 고토가 새삼스럽게 아쉬움으로 다가왔사옵니다.”
“과인이 만권당을 세운 깊은 뜻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여몽 문화 교류로 ‘자주성을 잃은 고려’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옵니다. 원나라 대신들 사이에 친고려 여론을 형성하여 고려의 국익을 증진하는 정치외교 방책의 높은 뜻이 있으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익재는 과인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네. 익재는 학문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내성외왕(內聖外王). 즉 안으로는 심성을 수양하여 성인의 도를 따르고 밖으로는 임금의 덕을 갖춰 나라를 평안케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원나라에서 학문하는 선비들은 모두 천하에서 선발된 사람들이네. 그동안 나의 부중(府中)에는 그들에 필적하는 사람이 없어 수치로 생각했네. 그러나 오늘 익재가 왔으니 고려 문화의 진면목을 그들에게 알려 주기 바라네.”
“소신이 비록 배움이 부족하고 미력하나, 부지런히 학문에 정진하여 상왕 전하의 높은 뜻을 잘 받들 수 있도록 견마지역(犬馬之役)을 다하겠사옵니다.”
만권당에서는 성대한 초대연이 이제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충선왕이 좋아하는 고려 인삼주와 연경의 별미인 오리요리, 불도장, 제비집, 전복요리, 능성어찜 등 진기한 음식들이 주안상으로 나와 눈과 입을 즐겁게 했다. 사위(四圍)는 조용했으나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충선왕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좋은 날 가무가 없어서야 되겠는가?”
충선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무희들이 연회장으로 나와 가무로 흥을 돋우었다. 이에 질세라 충선왕은 파탈을 하고 직접 어주를 하사했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모두 거나해졌다. 
이 때 충선왕이 예고도 없는 제안을 했다.
“익재 공, 만리타국에 나와 향수병에 젖어 있는 만권당의 관원들을 위해 노래 한 곡조를 들려주게.”
한 궁녀가 재빨리 일어나 가야금을 대령했다. 이제현은 몇 번 사양하다가 마침내 열두 줄의 가야금 줄을 고르면서 말했다. 
“상왕 전하의 만수무강을 위해서 한 곡조 타겠사옵니다.”
“무얼 타 보겠는가.”
“이연년(李延年)이 한(漢)나라 무제(武帝) 앞에서 부른 노래를 타보겠사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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