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름한 집에 웬 고급 승용차.’불법 대선자금의 원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각 당이 당사이전이라는 회심의 카드를 선보였다. 열린우리당은 영등포 폐공판장 건물로, 한나라당은 여의도의 공터에 천막을 쳤다. 두 당 모두 대표의 ‘새 출발’이란 강한 의지를 담고 당사 이전을 결정했지만, 정치권에선 ‘마치 더 불쌍해 보이기 경쟁을 하는 것 같다’는 쓴소리가 나온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시선도 싸늘하다. 총선 승리를 위한 ‘정치적인 쇼’이자 ‘이벤트 정치’라는 분위기다. 더구나 빈곤해 보이는 당사를 드나드는 의원들의 고급 승용차들은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열린우리당‘폐공판장 당사’바퀴벌레 나돌아

‘당사 이전’카드를 처음 꺼낸 곳은 열린우리당이다. 안희정씨의 불법자금 2억원이 열린우리당 창당자금으로 유입됐다는 검찰의 발표가 나오자 정동영 의장은 “당이 내건 ‘클린’ 이미지에 먹칠을 할 수 없다”며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것. 내부 반발은 있었지만, ‘부정한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겠다’는 정 의장의 뚝심 앞에 모두 무너졌다. 실제 정 의장은 당직자들의 “당사이전은 언급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만류에도 “불법자금이 유입된 당사를 깔고 앉아 1당이 될 수 없다”며 “당장 퇴거 준비에 착수하고 폐공장부지로 가든, 천막을 치고서라도 떠나야 한다”고 뜻을 굽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 당 내부에선 ‘정동영 의장은 정말 못말리겠다’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다. 정 의장의 말처럼 열린우리당은 영등포 청과물시장 내 폐 공판장 건물에 새로운 터를 잡았다.

주변환경은 그야말로 열악하다. 바퀴벌레, 쥐벼룩이 돌아다녀 여성 당직자들은 종종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박영선 대변인의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우겠다는 심정으로 임하겠다”는 논평에서 보듯 서민적 분위기를 통해 국민과 함께 하고 있다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적격인 장소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일제히 불법정치자금이 창당자금으로 들어난 사실을 희석시키기 위한 일종의 ‘정치적인 쇼’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또 정치권 일각에선 ‘당 내부의 공천 잡음과 일부 공천자들의 불법선거운동 문제 등 당 내부문제를 당사 이전을 통해 새롭게 추스르기 위한 노림수도 포함돼 있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한편 열린우리당은 이번 당사이전으로 기존에 있던 건물주와 1년으로 정한 임대계약을 어겨 억대의 위약금을 물어야 할 처지에 놓였다.

한나라당, ‘폐공판장 당사’에 맞서‘천막당사’

열린우리당의 당사이전을 싸구려 ‘정치쇼’라고 비난했던 한나라당은 새대표가 선출되자마자 오히려 한 술 더 떴다. 새로 선출된 박근혜 대표가 출근 첫 날부터 “기존 당사에는 들어갈 수 없다”며 당사를 여의도공원 옆 옛 중소기업전시장 터로 옮긴 것. 당내 소장파들의 ‘차떼기 당’이미지를 탈피 새롭게 변해야 된다는 목소리를 박 대표가 전격 수용하면서 결정된 일이다. 한나라당은 이곳에 천막 2동과 컨테이너 4동을 설치해 이른바 천막당사 생활을 시작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등 외견상으로 볼 때 주변환경은 열린우리당의 폐공판장 건물보다 훨씬 열악하고 불쌍해 보인다. 과거 화려한 영화를 누렸던 한나라당이 이처럼 처량한 신세가 됐지만 서울시와 계약한 내용을 보면 그다지 싼 임대료는 아니다.

40일간의 임대계약을 조건으로 서울시에 4,248만9,000원을 주는 것으로 협의한 것. 평당 48만원대로 빈 공터에 천막을 친 것치고는 상당한 금액이다. 이같은 한나라당의 천막당사 이전에 대해 국민여론은 무관심한데 비해 정치권을 달랐다. 한나라당이 ‘천막당사’ 이벤트를 선보이자 열린우리당이 ‘따라하기의 극치’라며 발끈한 것. 열린우리당은 또 그 위치에 자신들이 가건물을 지어 쓰겠다고 요청했을 땐 서울시가 거절했다고 서울시까지 비판했다. 박영선 대변인은 “가설건축물법에 따라 천막 시설에는 전기·수도·가스를 설치할 수 없어 한나라당 천막 당사는 불법이다”며 “우리 당엔 안 된다고 하고 야당엔 허용한 건 한나라당 소속 이명박 시장의 신종 관권선거”라고 쏘아붙였다. 정치권에서도 기존에 있던 당사를 팔아 불법대선자금을 변제하겠다는 의지로 보이지만, 내심 이회창 전총재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는 해석도 있다.

민주당 ‘돈 없어 당사에서 쫓겨날 판’

조·추 간의 갈등으로 제2의 분당위기까지 내몰렸던 민주당은 돈이 없어 이사도 못가는 가장 불쌍한 신세다. 민주당은 현재 대선이후 임대료 37억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로부터 피소를 당한 상태다. 건물 소유주인 H사가 지난해 11월 14일 민주당을 상대로 ‘밀린 임대료와 관리비 37억5,000만원을 내고 당사를 비워달라’며 명도소송을 낸 것. H사는 소장에서 “지난 6월30일로 임대차 계약이 끝났는데도 민주당이 건물을 비우지 않은 채 밀린 임대료와 관리비도 내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실제 지난 2000년 1월 이 건물에 입주한 민주당은 대선이 끝난 뒤부터 약 열달치의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했으며, 불법 정치자금 논란으로 후원금도 크게 준 것으로 알려졌다.특히 당사를 이사하려고 해도 밀린 임대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나가지도 못하는 실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겨울에는 난방이 끊겨 고생했다는 말은 민주당의 현주소를 그대로 전해준다. 이 때문인지 민주당은 두 당의 당사이전에 대해 “차떼기당 한나라당과 이에 버금가는 열린당이 천막당사와 폐공판장 당사를 두고 경쟁하는 희대의 촌극을 벌이고 있다”고 비난했다. 김재두 부대변인은 3월 24일 논평을 통해 “열린우리당이 불법자금으로 당사를 구입해 놓고 한나라당의 천막당사의 불법성을 지적하고 있다”며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는 시조를 인용해가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부패정당의 이미지를 벗으려는 생쇼를 하고 있다”고 혹평했다.한편 민노당이 지난해 6월 이전한 당사는 과거 DJ가 대선에서 승리한 장소다. 이에 당 내부에선 당사 이전으로 이번 총선에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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