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고 보자 식 조사 그만했으면…

<뉴시스>

[일요서울 ㅣ이범희 기자] 지난 1년간 재계를 대표하는 10대 그룹 대부분이 사정기관의 압수수색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결은 대부분 ‘기각’. 기업들 입장에서는 검찰이 일단 털고보자는 식으로 수사를 하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다.

검찰 수사로 기업 이미지 실추는 물론 오너 일가가 망신만 당했다며 뒷말을 하기도 한다. 이러는 사이 사정기관은 물방망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재계의 한 원로는 “기업 위축되게 하지 말라”며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압수수색만 10번 받은 곳도…기업 망신주기냐 푸념도
“기업 위축되게 하지 마라” 목소리 나와…검찰 반응 주목


국내 간판기업인 삼성전자는 노조 와해 혐의로 벌써 10번째 압수수색을 받았다.
검찰은 지난달 10일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등을 압수수색했다.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에 대한 압수수색은 지난 5월 이후 두 번째다.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부장검사 김성훈)는 이날 “노조 와해 사건과 관련해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등 3~4곳을 압수수색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삼성전자 본사 등에 검사와 수사관을 보내 노사 관계 관련 문서와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확보했다.

압수수색 대상에는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집무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의장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삼성전자 경영지원실장 겸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냈다.

앞선 5일에는 현대자동차 등 기업 4곳을 동시 압수수색했다.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검사 구상엽)는 이날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 본사 인사팀에 검사와 수사관을 보내 인사 관련 문건과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확보했다. 현대건설과 현대백화점, 쿠팡 본사도 압수수색 대상에 포함됐다.

검찰 관계자는 “공직자윤리법 위반 혐의와 관련한 자료 확보 차원에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고 설명했다.

공직자윤리법은 4급 이상 공직자가 퇴직 후 3년간 퇴직 전 5년 동안 소속됐던 부서 또는 기관의 업무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곳에 취업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앞서 검찰은 공정위 간부들이 이 같은 퇴직공직자 취업제한제도를 위반하고 유관기관과 기업에 취업한 정황을 잡고 공정위, 인사혁신처 등 정부부처와 신세계페이먼츠, JW홀딩스 등 기업을 압수수색했다.

이외에도 LG그룹은 총수일가의 탈세혐의로 지난 5월 압수수색을 당했고 갑질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대한항공 본사에 대한 광범위한 압수수색도 벌어졌다. 포스코도 압수수색을 당했다. 은행권에서는 국민은행이 채용비리 혐의로 압수수색을 받았다. 최근에는 유한킴벌리도 불법 취업 논란에 휘말려 압수수색을 당했다.

IT기업도 압수수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드루킹 파문이 벌어지자 네이버와 카카오, 네이트의 SK컴즈 모두 압수수색을 당했다. 올 들어 30대 그룹 중 압수수색을 당하지 않은 곳이 드물 정도다.

게다가 올 들어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 기각률이 평년의 두 배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검찰이 압수수색 영장 청구를 남발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기업 경영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카 커지고 있다.

15일 검찰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검찰은 3305건의 압수수색 영장을 법원에 청구했다. 이 가운데 3110건이 발부됐고, 173건은 기각됐다. 압수수색 영장 기각률이 5.2%로 역대 최고치다. 2013년 이후 연평균 기각률은 2~3%대에 머물렀다. 지난해 같은 기간(1~5월) 압수수색 영장 기각률도 3.0%였다.

5%대 압수수색 영장 기각률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일단 압수수색부터 하고 보자’는 검찰의 접근 방식에 대한 불만도 터져 나온다.
압수수색이 무분별하게 이뤄지면 개인과 기업의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어서다. 

기업들은 압수수색을 당할 때 업무 차질은 물론 피의사실과 관련 없는 영업비밀이 유출되면서 ‘2차 피해’를 겪지 않을까 심각하게 우려한다. 회사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 하락도 걱정이다.

수사 당국이 정당한 법 절차에 따라 압수수색을 벌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다는 비판이 나온다.

기업의 한 관계자는 “의혹이 있다면 정정당당하게 수사를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일상적인 업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몰아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이제는 압수수색을 당해도 직원들 사이에서 ‘그러려니’한다”고 밝혔다.

오히려 “압수수색 때문에 일을 제 시간에 끝맞추지 못해 사업적 피해를 입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대외협력 담당자는 “수사 인력이 빈 박스를 들고 나가는 사진이 언론을 통해 외부에 알려진 적이 있는데 회사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비춰지고 범죄집단처럼 묘사된 적이 있다”며 “기업은 압수수색을 당하는 순간 사실상 업무가 마비된다. 외부 이미지가 나쁜 상황에서 무슨 투자를 늘리고, 고용을 확대할 의욕이 생기겠나. 압수수색 남발은 기업과 국민에 대한 사법권력의 ‘갑질’이나 다름없다”고 날을 세웠다. 

무차별 압수수색에 대한 기업의 불만이 커지는 가운데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최근 매일경제신문이 마련한 이목희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과의 긴급대담에서 “정부는 개별 기업을 찾아가 애로사항만 듣고 해결도 제대로 못하는 쇼를 하지 말고, 진짜 기업들이 뛸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정부, 조력자 역할 더욱 집중해야

진 전 부총리는 일자리와 관련해서도 정부는 조력자에 머물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정부가 주도해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정부는 간섭하지 말고 기업들이 열심히 하도록 돕는 역할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세계 무대를 누비는 방탄소년단이나 LPGA에서 우승하는 골프선수들도 정부가 나서서 했으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진 전 부총리는 우리나라 경제, 노동 정책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1996년 노동법 파동, 1997년 외환위기, 2000년대 초로 이어진 실업사태 당시 노동부 장관과 기획예산처·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내며 정부 정책을 진두지휘했다. 한때 기아자동차 회장을 역임해 시장에 대한 이해도 깊다는 평가를 받는다. 경제·노동분야에서 민관의 경험을 모두 가진 대표적인 브레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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