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과 운전하는 수행비서는 불가분의 관계다. 비공식 일정을 함께 소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차 안에서 ‘영감’(모시는 국회의원 칭함)의 은밀한 대화도 공유한다. 또한 공식 일정이 밤늦게까지 이어질 경우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하고 끝나면 집에까지 모셔다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과거에는 의원의 학연·지연·혈연 관계에 있는 인사나 선거를 치르면서 신뢰를 쌓은 사람을 위주로 수행 겸 운전기사 역할을 맡겼다. 노동의 강도가 세지만 직급은 9급으로 홀대받는 직업이다. 하지만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직을 떠나도 영감들이 제일 먼저 챙기는 대상이 수행비서였다.

하지만 19대, 20대 국회가 들어서면서 의원과 수행비서의 관계가 달라지고 있다. 일단 ‘신뢰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 ‘혈세 데이트’로 논란을 일으킨 함승희 강원랜드 전 대표의 경우처럼 전직 수행비서진들이 함 전 대표의 불리한 증언을 하고 있다.

함 전 대표는 ‘포럼의 법인카드’로 사용했다고 반박하자 수행비서들은 강원랜드 법인카드로 했다고 재반박했다. 30대녀와 해외 출장도 몇 번 안 된다고 주장하자 전직 비서진들은 “몇 번 빼고 매번 공항까지 바래다 줬다”고 했다.

모 매체 단독 기획기사지만 기획단계 전 전직 비서진들의 내부 폭로가 단초가 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경우 운전기사와 함께 수행한 김지은 비서가 ‘성폭행’ 폭로를 하면서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게 됐다. 올해 5월 말경에는 ‘여성 국회의원과 수행비서의 불륜’에 대해 허위사실을 폭로한 60대가 벌금형을 받았다는 기사도 화제가 됐다.

모시는 영감에 대한 사적 영역을 꿰뚫고 있다 보니 직에서 나온 다음에 폭로가 이어지는 사례가 빈번해지면서 국회의원과 수행비서의 관계가 달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본지에 토로한 18년간 운전을 한 인사도 이 점에 동의했다. 더 이상 ‘심기운전은 없다’고 단언하고 있다. 심기 운전이란 수행비서가 운전을 하면서 영감의 기분에 맞춰 운전을 하는 것으로 다년간 함께해야 가능한 운전법이다.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차 안에서 은밀한 대화를 하지 않는다. 전화도 삼간다.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행비서 역시 운전만 하지 않는다. 최근 정치권 홍보수단으로 부상한 페이스북, 트윗터, 유투브 등 SNS홍보 업무도 하고 있다. 정시출근 정시 퇴근하는 수행비서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 달에 한 번 월차를 쓸 경우 다른 보좌진들이 대신 운전병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예전처럼 국회 내 수행기사 대기하는 방도 비서들의 잡담으로 시끌벅적하지 않아졌다. 수행비서가 육체적으로 편해졌지만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는 더 많아졌다. 운전 외 다른 업무를 하는 것도 힘들지만 무엇보다 영감과 신뢰가 무너진 게 주된 요인이다. 또한 9급이 수행비서 직급이지만 고생하는 탓에 7급을 받고 운전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 기대하기 힘들게 됐다.

최근 춘천 지역구 김진태 자유한국당 수행비서가 투신자살해 운전기사들 사이에 회자가 됐다. 주식투자를 했다가 실패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과거의 영감과 운전기사 관계였다면 영감에게 경제적 어려움을 얘기하면 개인 돈을 털어서라도 해결해 주는 일도 많았다. 갑과 을, 주종관계를 벗어났지만 수행비서들의 마음은 허하다. 영감과 수행비서 관계에서 신뢰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지만 근본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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