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계 ‘저작권’ 잘 지켜지고 있나?

<뉴시스>

[일요서울 | 강민정 기자] 인간은 ‘예술’을 한다는 점에서 다른 종(種)과 변별된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글, 음악, 미술 등의 표현 수단을 통해 창조하고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 안에는 만든 이의 숨결이 담겨있다.

이것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바로 저작권이지만, 아직 이를 지켜야한다는 사회적 인식은 미진한 실정이다.

김창완 “실질적 음반 기획 담당…산울림 1~6집의 저작권자”
조용필 “예전에는 저작권이라는 것 없어”…시대 상황 한몫

 
지난 4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8단독 재판부(이광영 부장판사)는 김창완 씨가 ‘서라벌레코드사’ 전 대표 A씨, 음반제작자 B씨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들이 김 씨에게 9100여 만 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당시 A씨는 다른 제작자 대표인 C씨와 저작인접권 이용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며 서라벌레코드사로부터 산울림 1~6집에 대한 권리를 승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원고(김창완)가 현재 음반의 마스터 테이프를 갖고 있고, A씨가 어떤 경위로 음반에 관한 권리를 취득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점” 등을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작인접권은 실연자(實演者)의 권리, 음반제작자의 권리, 방송사업자의 권리 등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음반제작자의 경우 음반을 복제·배포할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으므로 A씨는 이 점을 들어 자신의 적법성을 입증하려 한 것이다.

이와 달리 저작권이란 인간의 사상 또는 감정을 표현한 창작물인 저작물에 대한 배타적·독점적 권리를 갖는 것을 뜻한다. 저작권자의 허락 없이 저작물을 복제하거나 권리를 침해한다면 저작권자는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
 
재판부 김창완 손 들어줘
“과거 부당 관행 깨 고무적”

 
김 씨는 1977년 말부터 1980년 5월까지 ‘서라벌레코드사’를 통해 산울림 1~6집 음반을 냈다.

A씨는 앞서 말한 C씨에게 산울림 음원에 대한 사용 계약을 맺은 뒤 2014년 산울림 1~3집과 4~6집을 각각 묶어 ‘산울림 트릴로지 1·2’라는 이름의 CD를 발매했다.

이후 2016년 1월 다시 이 음원들을 이용해 ‘산울림 앤솔로지: 서라벌 레코드 시대 1977-1980’ LP 8장을 500세트 한정으로 제작한 뒤 판매했다.

이 과정에서 김 씨의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의 단초가 됐다. 김 씨는 산울림 음반 수록곡의 작곡, 작사. 편곡, 악기연주, 재킷 디자인 등을 총괄하며 실질적인 기획을 도맡은 인물이다.

이에 김 씨는 자신이 음반 녹음 과정을 기획·주도하고, 편집에서도 주축을 담당한 점을 들어 산울림 1~6집의 저작권자라고 못 박은 뒤 소송을 제기했다.

저작권자인 자신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음반을 냈으니 이에 대한 손해를 보상하라는 의미였다.

재판부는 “피고들(A씨 등)이 음반 권리자인 원고에게서 적법한 이용 허락 등을 받지 않고 음원에 관해 이용 계약을 맺고, 음반을 발매한 행위는 원고의 복제권 및 배포권을 침해한 공동불법행위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피고들이 공동으로 원고가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 뒤 A씨 등이 음반을 판매해 얻은 매출액 9100여만 원을 김 씨의 손해액으로 보고 그만큼의 액수를 김 씨에게 지급할 것을 명했다.

이러한 결과에 관해 당시 김 씨의 변호를 맡았던 법무법인 웅빈은 “당시는 저작권 개념이 보편화돼 있지 않아 계약서는커녕 구두계약조차 없었던 상황”이라며 “이를 고려했을 때 이 사건의 승소는 과거 부당 관행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결과”라고 평가했다.

한편 2016년 2월 김 씨는 같은 음반에 대해 제작, 판매, 배포 등을 금지해 달라며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으나 승인되지 않았다.
 
 
<뉴시스>

예술가 실효적 도움↓
비율 산정 잘못됐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바운스(bounce)’ 등 세대를 아우르는 노래들로 가왕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조용필도 이와 관련해 지난한 시간을 보낸 바 있다. 그가 만들고 부른 31곡의 저작권에 대한 논의가 27년이 지난 2013년 9월에서야 진행됐던 것.

조 씨는 1986년 D레코드사의 E회장과 음반 계약 체결 당시 방송권과 공연권은 자신이, 배포권과 복제권은 E회장이 보유하도록 했다.

여기에 해당된 31곡이 방송과 공연을 통해 노출될 경우 조 씨가 저작권료를 받지만 노래를 녹음해 음반 등으로 판매할 경우 E회장에게 저작권료를 지급해야 했다.

이러한 불합리한 계약을 체결한 데는 저작권 개념이 보편화돼 있지 않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도 한몫했다.

조 씨 역시 2013년 3월 19집 앨범 ‘헬로(Hello)’ 발매 기자간담회서 “예전에는 저작권이라는 게 없었다. 난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 그런 걸 모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조 씨는 당시 노래 자체의 복제·배포권이 아닌 음반의 복제·배포권으로 알고 양도계약을 한 것이라며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E회장과의 소송도 치렀지만 2000년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2006년 E회장이 사망하자 복제·배포권에 대한 저작권은 그의 아들에게로 양도됐다.

위 사실은 2013년 5월 그룹 시나위 소속의 신대철이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1986년 B회장이 조용필 선배와 음반 계약을 하면서 31곡에 대해 ‘저작권 일부 양도’ 계약도 슬쩍 끼워서 계약했다”고 폭로하면서 드러났다.

이 중에는 ‘창 밖의 여자’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등 유행곡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다음 아고라에 “가왕 조용필의 31곡 저작권 반환을 요구합니다”라는 청원글이 게시되는 등 사회적 반향을 불러오자 문화체육관광부는 직접 1986년 조용필의 31곡에 대한 복제·배포권이 E회장에게 양도된 것이 사실이라는 입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저작권은 창작자들의 엄연한 권리이지만 현재까지도 보장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실제 홍대 인디 신에서 밴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F씨는 자신들의 저작권이 실제 보호받고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저작권협회 등이 권리를 내세우면서 시행하는 사업들은 예술가에게 실효적으로 도움되는 부분은 극히 일부”라면서 “저작권료, 음원 전송료 등이 예술가에게 실제적으로 돌아가는 몫이 매우 적도록 비율 산정돼 있다. 사업은 사업일 뿐”이라고 일갈했다.

또 “(현 사회는)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에 값을 매겨야 하고, 예술가는 그것을 팔아 생활을 해야만 하는 기형적인 구조”라고 씁쓸함을 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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