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사직을 구한 불멸의 명신 이제현

학문을 연마하면서 봄날을 희롱하던 어느 날.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아미산(峨眉山, 사천성의 명산)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익재, 공은 아미산에서 행해지는 산신제에 원 황제의 특사 자격으로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 지내는 일)를 하고 돌아오게.”
“상왕전하, 분부 잘 받들겠사옵니다.” 
“시문은 원나라 상류층의 중요한 교제의 수단이네.” 
“예, 그러하옵니다.”
“과인은 원나라 문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의 여행 시들을 활용할 계획이네. 그러니 공은 여행 중 쓴 시를 인편을 통해 ‘특급우편’으로 연경에 부치기 바라네.”
“알겠사옵니다. 소신, 상왕전하의 하해와 같은 성은에 보답할 수 있도록 신명을 다 바치겠사옵니다.”
“먼 여로에 건강에 유념하고 많은 풍물을 접하는 기회로 삼기 바라네.” 
“이번 여행을 통해 소신의 부족한 학문을 익히고 견문을 넓히도록 하겠사옵니다.”
상왕의 명을 받은 이제현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처한 지금 상황에서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것은 한시(漢詩)를 통해 고려 문화의 우수성을 원나라 황실과 조정에 알림으로써 실추된 고려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다.
중국에서 고려의 문학 상품이 통하려면 중국 본토인들의 그것보다 더욱 중국 본토적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그들이 눈길이나마 줄 게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원나라 지배의 정당성을 요령껏 노래하면서도 그 속에 고려 역사의 정통성, 우수한 문화에 대한 찬양, 임금과 고국에 대한 내연(內燃)의 그리움을 빼놓지 말자.’
한편, 만권당에서 교분을 가졌던 조맹부는 제자처럼 아끼던 이제현을 전송하면서 장도에 오름을 위로하고, 속히 돌아오기를 축수(祝手)하는 <전별시>를 지어 주었다.

삼한에서 파촉(巴蜀, 사천성 일대)까지 그 거리가 만여 리.
잔도(棧道)는 하늘로 올라가듯 하고 검문산을 넘을 수 없으리라만,
누가 시켜 이 더위에 말을 타고 치달리나.
나라 일은 일정이 있기에 내 어찌 편히 지내길 바라랴.
도로는 왜 이렇게 험하고 멀며 산천은 또 얽히고 서렸는지.
다행히 그곳에는 고적이 많아 소요할 수 있으리라만.
금성(錦城, 사천성 성도)이 즐겁다 말고 일찍 돌아옴이 상책이리. 
하늘 높고 날씨 맑은 날 서남 모퉁이를 멀리 바라본다오. 
아미산 여행길에는 원의 대학자인 우집(虞集, 원시 4대가의 으뜸)이 동행했다. 이제현은 가고 오는 긴 원행 길에서 우집과 학문과 시문에 대해 심오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무척 행복했다. 
이제현은 말을 타고 하남성 낙양에 들러 효자 왕상(王祥)의 효행이 담긴 비문을 읽어보면서 문득 고국 개경에 계신 부모님 생각에 부끄럽고 죄스러운 마음을 <왕상비(王祥碑)>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有扁路傍石(유편로방석) 길가에 나직이 세워져 있는 비석
上有王祥字(상유왕상자) 왕상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네.
臥氷得泉魚(와빙득천어) 얼음바닥에 드러누워 잉어를 구해다가
饋母此其地(궤모차기지) 어머니를 공궤하던 그 곳이로구나.
嗟我事宦遊(차아사환유) 아, 나는 지금 벼슬살이로 떠도느라
連年負慈侍(연년부자시) 여러 해 동안 어머님을 모시지 못했네.
區區望雲心(구구망운심) 구름을 바라보는 마음 구구하지만
甘旨遠難致(감지원난치) 맛있는 음식 멀어서 드리지 못하네.
何當報剪(하당보전환) 머리카락 잘라 팔던 부모 은혜를 어떻게 갚을꼬.
僅足同齧臂(근족동설비) 성공해서 고향에 가겠다고 겨우 말할 뿐이네.
載讀孝子碑(재독효자비) 비로소 이 효자의 비문을 읽어보니
茫然放淸淚(망연방청루) 망연히 두 눈에서 눈물만 쏟아지네.

이제현은 낙양을 떠나 위휘(衛輝)에 있는 비간의 사당에 들러 <비간묘(比干廟)>라는 시를 지었다. 그는 두 임금(주 무왕, 당 태종)이 다른 대(代)의 신하를 그리워한 것은 그 충(忠)을 슬퍼하고 그 죽음을 가엾이 여긴 것이지만, 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한 뒤에 백이(伯夷)를 소홀히 한 것과, 태종이 고구려를 치는 날 위징(魏徵)을 의심한 것은 잘못이기 때문에 춘추(春秋)의 어진 이에게 책비(責備, 남에게 모든 일을 다 잘해 주도록 요구함)하려는 마음을 담아 시를 지었다.

주왕(무왕)이 무덤을 봉축하여 은나라 신하(비간)를 예한 것은 
충성된 말 하다가 몸을 죽인 것을 아까워하였기 때문이거니. 
무슨 일로 황양에 말을 돌려보낸 뒤에도(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
포륜(蒲輪, 부들바퀴)으로 고사리 캐던 사람(백이·숙제)에게 청하지 않았던가. 
원래 분함과 욕심은 사람의 양지(良知, 타고난 지능)라 
날이 저물어 사람으로 하여금 역시(逆施,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를 하게 한다.
비간의 무덤에 몸소 제사지낸 것은 좋았는데 
어찌하여 위징의 비는 넘어뜨렸던가.

잔도에서 이백, 성도에서 두보의 발자취를 확인하다

사천성의 명칭이 붙은 유래는 이러하다.
양자강·민장강·퉈강·자링강의 4대 강이 성내를 흐르기 때문에 ‘사천(四川)’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사천성의 지세는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양자강 물은 민산(岷山)에서 나와 성도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삼협(三峽)을 향해 내달리며, 물결은 빛나고 산은 그림자 져 위 아래로 요동친다. 사천성으로 가는 길은 아주 험하고 좁다. ‘촉(蜀)의 잔도’라고 일컬어지는데, 당나라 이백(李白)은 고향 촉으로 가는 육로의 험준함을 <촉도난(蜀道難)>이라는 시로 읊었다. 

一夫當關 萬夫莫開(일부당관 만부막개)    
蜀道之難 難於上靑天(촉도지난 난어상청천) 
한 사람이 관문 막으면 만 사람도 뚫지 못하네!  
촉나라로 가는 길은, 푸른 하늘을 오르기보다 더 어렵다네!
          
이 시를 본 하지장(賀知章)이란 원로 문인은 이백을 ‘보통 사람이 아니라 인간 세계로 귀양 나온 신선’이란 뜻으로 ‘적선인(敵仙人)’이라 칭하고 황제에게 천거했다고 한다. 
이제현은 산서성·섬서성의 지역을 거쳐 기산(岐山, 주나라 고공단보가 옮겨 살던 곳) 남쪽에 이르러 관중에서 사천성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대산령(大散嶺)을 넘었다. 포성역(褒城驛)을 지나서 잔도(棧道, 절벽과 절벽 사이에 걸쳐놓은 다리 길)에 올랐다.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과 맞닿은 기암절벽이 일행들을 압도했고, 아래를 내려보니 절로 오금이 저려왔다. 이제현은 문득 여기에서 초한전(楚漢戰)의 영웅인 유방, 항우, 장량을 생각해 보았다. 
진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최고의 실력자 항우는 유방을 ‘한왕(漢王)’에 봉했다. 유방의 군사 장량은 유방이 본국으로 가는 길을 한중 조금 못 미친 포성역까지 전송했다. 
장량은 이때 유방에게 “지나간 뒤에 잔도를 불사르십시오” 라고 조언했다. 이는 유방이 파(巴)·촉(蜀, 사천성) 밖으로 나가 항우와 천하를 다툴 의사가 없음을 표시하여 항우의 군대를 안심시켜 힘을 기른 후, 후일 천하의 패자가 되기 위한 계책이었다.
잔도를 출발한 이제현은 검문관(劍門關, 사천성과 섬서성을 연결하는 관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성도(成都, 사천성의 중심도시)에 이르렀다. 성도에 도착하면 무엇보다 먼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시성 두보의 발자취였다. 이제현은 이윽고 성도 서문 외곽에 위치한 두보초당(杜甫草堂)을 찾았다. 
초당 정문을 들어서니 시사당(時史堂, 두보를 찬미하는 칭호)이 나왔고, 두보의 소상(塑像, 찰흙으로 만든 사람의 형상)이 있었다. 한눈에 야위어 보이는 두보의 모습에서 왠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평생 궁핍과 좌절 속에서 벼슬의 뜻을 얻지 못하고 유랑생활을 하던 두보가 48세 때 안사의 난(安史之亂)을 피해 이곳에 와서 3년간 살았는데, 이 기간에 그가 지은 시는 240편에 이르니 그의 삶은 그 어떤 벼슬보다도 위대하다고 하겠다. 
이제현은 두보의 일생을 엿볼 수 있는 역사자료와 문화재가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감격했다. 때마침 여름비가 간간히 내리기 시작하자 촉촉이 젖은 초당의 고즈넉한 분위기가 시심을 자극했다. 이제현은 자신도 모르게 두보의 아름다운 명시 ⟨춘야희우(春夜喜雨)>⟨강촌(江村)⟩을 나지막이 읊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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