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공정위 조사방해 행위 논란


“내려오는 오더(명령)는 있으나 이를 지시한 실체는 없다(?)”. 이는 정치권과 재계 일부에서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구조조정본부가 삼성그룹 내부를 총괄하는 조직이라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소문이다. 소문대로라면 구조본은 삼성 내부조직의 꼭지점에 있는 셈이다. 그러나 구조본이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삼성과 관련된 여러 부당행위에서 구조본은 어떠한 법적 제재도 받지 않아왔다.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어떠한 장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권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는 상법보완을 통해 구조본의 경영책임을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래전부터 제기돼왔었다.

삼성전자, 삼성계열사에 총 1986억원 부당지원

열린우리당 박영선 의원은 삼성그룹이 지난 1999년 공정거래위원회의 부당내부거래 조사에 앞서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의 주도하에 조사과정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내부자료를 폐기하거나 수정하도록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공정거래 조사관련 문제점 및 대응방안’란 이름의 문건을 공개했다. 박 의원 측은 이 문서를 삼성 측에서 작성했다고 말했다. 문건은 1999년 4월 19일에 작성됐다.
문건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97년부터 99년 3월까지 구조본에 ‘광고 PR분담‘이란 명목으로 1,226억원을 지원했으며, 중앙일보에는 ‘광고 및 협찬’이란 명목으로 323억원을 지원했다. 이밖에도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이 대주주로 있는 에버랜드에 221억원, 삼성 SDS에 131억원 등 총 8개 계열사에 1,986억원을 지원했다.
이같은 삼성계열사 간의 부당지원은 공정거래법상 부당내부거래에 해당하는 행위다. 특히 이 부당지원 금액은 99년 당시 공정위가 적발한 삼성그룹의 부당지원 거래규모 3,997억원에는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다.
문서상에는 구조본이 공정위 조사 과정에서 부당지원사실이 문제가 될 것에 대비해 해당 계열사들에 “구조본 공문 및 지원결정 보고서를 폐기하고, 관련 자료를 조직적으로 은폐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경제개혁연대(소장 김상조 한성대 교수) 관계자는 “당시 적발되지 않은 금액이 있다는 것은 구조조정본부의 공정위 조사방해행위가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계열사 지원광고 대량집행
이 문건에는 구조조정본부가 자료를 은폐 및 조작한 방법이 크게 3가지로 정리돼 있다.
첫 번째는 공문폐기. 당시 삼성그룹 광고비의 경우 어떠한 계열사 분담금이나 별도의 근거 없이 국내광고비의 65%, 해외 광고의 91%를 삼성전자가 분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구조본은 비서실(구조본)에서 내려온 분담공문 일체를 폐기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삼성전자가 단독으로 계획에 따라 그때그때 광고를 집행한 것으로 대응토록 했다. 즉 구조본은 공문을 폐기한 뒤, 자료 수정 등을 통해 부당지원의 책임을 계열사에 떠넘긴 것이다.
두 번째로 구조본은 삼성SDS가 운영하던 유니텔에 대해 삼성전자가 131억원의 광고를 지원한 것과 관련해 관련 자료를 수정토록 지시했다. 당시 경쟁사인 천리안과 하이텔 등에는 광고 실적이 전혀 없었던 반면 유니텔에는 단가가 높은 광고가 대량 집행된 사실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예측한 것이다.
구조본은 비슷한 사이트의 광고 단가로 재조정한 후 품의서와 계약서를 수정하도록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구조본은 공정위 조사과정에서 불거질 문제에 대한 대응 논리를 개발하도록 적극 지시해왔다. 유니텔 광고에 대해서는 “다른 통신매체에 비해 직장인 비중이 높아 실구매층 광고전달률이 높다는 논리로 대응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삼성전자가 에버랜드 시설을 이용한 광고를 게재하면서 5년치를 일시불로 지불한 데 대해서는 “장시간 안정되게 광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대응하라”고 종용했다. 공정위 조사시 문제가 될 만한 사안에 대해서 미리 대응조치를 취한 셈이다.

부실계열사 지원·조정 역할도
지난 2005년 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꾼 구조조정본부는 이처럼 삼성 계열사에 대한 실제적이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법의 지배를 받지 않았었다.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에 있었던 것.
그러나 법적 실체가 없는 구조본이 삼성 계열사 경영에 깊숙히 존재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드러난다.
박영선 의원측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995년 삼성자동차 출범 당시 성공적인 시장안착을 위해 우수 옥외광고물을 통해 광고를 하기로 결정했다. 삼성은 이를 위해 우수 옥외광고물을 그룹차원에서 먼저 확보한 후 계열사에서 우선 광고를 집행하고 97년 이후 삼성자동차에 이관키로 결정했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는 경영이 악화되자 옥외광고물을 인수하지 않았다. 삼성전자는 98년 광고비 축소를 이유로 삼성자동차에 옥외광고물 17개의 인수를 서면요청했으나 삼성자동차 측이 경영환경 변화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통보하자 양사가 구조본에 조정을 의뢰한 것.
이에 대해 구조본은 계약 중도 해지에 따른 위약금 문제와 삼성전자가 삼성자동차 대신 지급한 광고비 149억원이 부당지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염려해 98년까지 17개 옥외광고 모두를 삼성전자에서 유지하고 99년 이후에는 10개만 전자가 유지하고 삼성생명과 삼성화재 등 관계사에서 인수하도록 조정했다.
즉, 부실계열사의 지원과 그 과정의 기획과 조정, 지시 등 일체를 구조본에서 수행한 것.
박 의원 측은 “구조본 지시에 의해 부실 계열사를 지원한 삼성전자와 삼성화재는 소액주주가 존재하는 상장기업이며, 삼성생명은 총자산의 13/14이 보험계약자의 몫인 금융회사”라며 “이들 계열사는 모두 법률적으로는 이사회가 경영책임을 지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구조본이 경영에 깊숙이 관여하여 이사의 역할을 해온 사실을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사례는 지난 99년에도 있었다. 지난 99년 발생했던 삼성카드의 삼성상용차 부당지원 사례. 삼성카드는 당시 삼성상용차의 3,400억원 유상증자 과정에서 실권주 1주당 1만원에 모두 1,250만주를 매입해 계열사를 부당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지난 9월 이를 부당지원으로 보고 87억 5,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이를 기획하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구조본에 대해서는 아무런 법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법적으로 본다면 구조본은 실체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구조지배본부
이 때문에 한 때 일부 국회의원들 사이에서는 구조조정본부가 아니라 구조지배본부라는 농담섞인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은 “구조본은 재벌 측 지배 기구를 위한 편의 기구며, 구조조정을 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든 기구인데, 사실상 구조를 지배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구조지배본부’”라고 비꼬았다.
이번에 박영선 의원이 공개한 문건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구조조정본부를 규율할 근거 마련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을 것으로 보인다.
박 의원은 “구조본이 이렇게 경영에 직접 개입하고 부실계열사 지원을 계열사에 부담시키는 행위는 불법”이라며 “그러나 구조본은 법적인 실체가 없는 조직이기 때문에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면서 “구조본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재벌개혁은 요원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구조본을 규율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이중대표소송제의 적용대상을 지분율 25% 이상의 모자 기업으로 확대 ▲이사에 해당하는 업무집행지시자에 구조본을 포함하여 법적책임을 묻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재까지 삼성구조본 당사자는 “삼성 측에서 나온 문서인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이며 조사방해를 받았던 공정거래위원회도 “사실여부를 먼저 확인해봐야한다”는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특히 삼성그룹 홍보실 관계자는 “자료의 출처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삼성 내부문건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며 박 의원 측 주장에 대해서도 “들어본 적 없다”고 부인하고 있는 상황.
그러나 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꾸며 새출발(?)을 꾀했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는 이번 박영선 의원 측의 문제제기로 인해 그 역할과 법적 책임에 대한 논란을 피해갈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 “삼성 군림은 공정위 미온적 태도가 원인”
시민단체들은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공정위 조사 방해를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경제개혁연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삼성의 공정위 조사방해는 이번 국정감사에서 박영선 의원이 제기한 것을 포함해 총 6회에 이른다.
지난 2005년에는 공정위가 가격담합을 조사하던 중 공정위 조사관이 확보한 자료를 삼성종합화학 직원이 빼앗아 달아나 해당 임직원에게 1억 8,500만원의 과태료가 부과됐다. 2000년에는 삼성 부당내부거래를 조사할 때 삼성카드 직원들이 공정위 직원들의 조사업무를 물리적으로 방해해 2명이 1,000만원씩의 과태료를 물었다. 이외에도 총 4회에 걸쳐 공정위의 조사를 방해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 중 1회는 공정위로부터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에 대해 경제개혁연대는 “조사방해행위는 그 사실 관계가 드러난다 해도 법적 제재가 쉽지 않다”며 “악의적 조사방해 행위가 밝혀진다해도 시효 5년이 경과한 경우에는 제재수단이 전무한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악의적 조사 방해행위에 대해서는 시효를 적용하지 않을 수 있도록 관련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당한 공무집행을 방해하는 행위가 계속되는 것은 이에 대한 공정위의 미온적 태도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했다. 공정위의 홍보실 관계자도 박영선 의원의 주장에 대해 “사실여부가 드러난다 해도 시효가 지난 사안이기 때문에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며 미온적 대응 지적에 대해서는 “말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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