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개편 제3지대 고건의 마지막 승부수


고건 전총리가 제3지대 통합신당 창당 깃발을 꽂을 기세다. 시기는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 중순. 그는 자신의 깃발 아래 열린우리당 내 통합신당파와 민주·국민중심당 일부, 그를 지지하는 정치권 외곽의 전문가 그룹까지 한데 아우를 수 있다고 거듭 외치고 있다. 하지만, 고 전총리가 그리는 정계개편 구상에 대한 정치권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김대중(DJ) 전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회동이 던져주는 충격파 때문이다. 게다가 차기 대통령감 선호도 조사에서 부동의 1위 자리도 이명박 전서울시장에게 내준 지 오래다. 이래저래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고 전총리. 정계개편의 서막을 장식한 그에게 과연 비책(秘策)은 있는 것일까.


결국, DJ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물론, 고 전총리 진영에선 ‘DJ-고건’ 회동 가능성에 대해 ‘정치공학적 논리’라고 손사래를 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고 전총리가 대북정책과 관련해 햇볕정책 조정을 주장한 대목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가을햇볕론’ 긴급 제안
사실, 고 전총리는 북핵 위기 직후 대북 강경대응을 주문했었다. 이를 두고 정치권은 ‘독자적인 이미지 구축’이라 했다. 또 ‘새로운 브랜드’라고 했다. 은연중에 ‘호남맹주’를 드러내면서도 ‘DJ와의 차별화’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 ‘가을햇볕론’을 들고 나왔다. 가을햇볕론은 햇볕정책을 탄력적으로 운용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이래저래 DJ에 대한 공격을 하고, 수습에 나선 것이라는 풀이가 나오고 있다.
어찌 됐든, 12월 신당 창당 이전 마지막 비책이 ‘DJ’로 모아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애초 고 전총리는 30명 안팎의 현역의원들로 ‘교섭단체’를 구성한 뒤, ‘국민대통합신당’의 후보로서 화려한 대권 출정식을 치르리라 계획했었다. 또 이를 기반으로 점차적으로 몸집을 불려나갈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이를 위해 열린우리당 및 민주당 내 수도권은 물론 호남 출신 일부 의원들과 참여 여부를 타진해 왔다. 이미 정치권 일각에선 ‘탈당 의원 리스트’마저 나돌았던 터다.
하지만, 고 전총리와 대선 운명을 같이 하고자 했던 현역의원들의 동요는 어느 순간 멈추고 말았다.
그가 정계개편의 물살에서 빗겨난 시기는 DJ가 정치 전면에 나서면서부터다. DJ는 “열린우리당의 비극은 분당에서 시작됐다”면서 우리당발(發) 정계개편 논의를 급물살 속으로 밀어 넣은 뒤, 목포를 방문해 ‘무호남무국가(無湖南無國家 :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를 외치고는 서울, 부산, 공주 등을 오가며 건재함을 과시하곤 했다.
그런 와중에 고 전총리의 대권 구상에 쐐기를 박은 사건은 DJ와 노 대통령의 전격 회동. 청와대는 “정치적인 얘기는 없었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하고 있고, DJ 역시 정치적 해석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으나 정치권에 그 말이 곧이곧대로 전해질 리 없다.
물론, 지금까지도 DJ와 노 대통령의 회동은 정치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정계개편 논의의 큰 틀, 판 자체를 흔들어버린 셈이다. 이미 노 대통령 배제를 염두에 두고 신당을 추진하던 우리당 내 통합신당파의 청사진은 빛이 바래졌다.
물론, 정계개편 논의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다. 우리당 주변 수면 위와 아래에서 크고 작은 요동이 감지되고 있다. 정기국회 회기가 끝나는 시점인 12월 보름께를 기해 우리당의 존폐가 판가름 날 것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기도 하다. 우리당은 현재 존재의 이유에 대한 물밑 논의가 종착역을 향해가고 있다.

“고건 신당, 민주 2진 정당”
문제는 우리당의 정계개편 논의에서 고 전총리의 존재감이다. DJ가 정치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 범여권 정계개편의 양대 축은 노무현-고건으로 압축됐다. 하지만, DJ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고 전총리의 정체성은 DJ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DJ-盧 전격 회동 후 정계개편의 축은 지지기반과 정체성의 경계가 뭉뚱그려진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 고 전총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여권의 정계개편 논의에서 외곽지대로 밀려난 셈이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우리당의 정체성 확립과 전당대회 개최로 모아졌던 노 대통령의 의지도 정계개편을 향하고 있다는 것 역시 짚고 넘어가야할 대목이다. 노 대통령의 핵심참모들이 전하는 노 대통령의 의지는 “정계개편에 반대하지 않는다”로 귀결된다.
여기에 우리당 창당 핵심세력인 정동영·김근태 전·현직 의장, 천정배 의원 등도 나서 각자의 살길을 모색하고 있는 형국이다. ‘DJ-盧’ 회동 후 우리당 정계개편 논의에서 급부상한 ‘영·호남 신당창당론’도 심상치 않다. 이는 여당 내 영남권 대표주자인 김혁규 의원이 주도하고 있다. 김 의원은 “열린우리당 주도의 소규모 정계개편이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대통령 중심의 영·호남 신당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계개편의 동력이라 할 수 있는 우리당 현역의원의 선택 기준도 모호해지긴 마찬가지다. ‘정치권 빅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지만, 정계개편에서 이들은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헤쳐모여’할 태세다. 물론, 어떤 모양새로 자리매김할 것인가에 대한 관측마저 아직은 섣부르게만 보인다.
고 전총리가 그리는 밑그림의 또 다른 합류 대상인 민주당과의 관계도 여의치 않다. 고 전총리가 창당을 선언한 이후 내부결속과 함께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모양새다. 당장 DJ의 움직임에 언론의 초점이 맞춰지면서 민주당에 대한 주목도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실제로 당내에선 정계개편과 관련된 목소리도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이는 고 전총리의 고민과 민주당의 위기가 일치하는 대목이다.
범여권 정계개편에 앞서 민주당의 최대 목표는 호남에서 맹주의 자리를 되찾는 것. 10월25일 재·보궐선거 이후 자신감을 회복했지만, DJ의 등장은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다는 민주당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는 셈이 되고 말았다. 물론, 호남의 중심은 어느새 민주당이 아닌 DJ로 옮겨졌다.
그렇다고 대 놓고 DJ의 정치개입을 성토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위기에 처한 민주당의 발톱은 애꿎게도 고 전총리를 향하고 있다. 특히, 한화갑 대표는 고 전총리의 정계개편 구상에 대해 “고건 신당은 민주 2진 정당이 될 것”이라는 폄훼도 서슴지 않는다.

지지도 3위로 주저앉아
DJ의 전면 등장이 느슨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고 전총리와 민주당의 기싸움에 팽팽한 한랭전선마저 생성시킨 것이다.
그런 만큼 고 전총리의 DJ와의 관계 재설정이 불가피한 상태다. 상황에 따라서는 차기 대권경쟁에서 고 전총리의 존재를 위협받을 수도 있는 민주당의 이유 있는 맹공이기 때문이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부터 민주당 내 일부 현역의원들과 전직 당직자 및 당원들과 긴밀하게 접촉해 온 게 사실이다.
게다가 고 전시장은 차기 대통령감 선호도 조사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청계천 복원 공사완공을 계기로 이 전시장에게 1위 자리를 내준 이후 현재는 박근혜 전한나라당 대표에도 밀리며 3위로 주저앉고 말았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분석도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이 전시장의 지지율이 상승할 수 있었던 계기는 고 전총리를 지지하던 중도보수층이 이 전시장쪽으로 기울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게 이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여론조사 전문가 A씨는 “우리당의 정계개편 입장 정리를 기다리다가 노선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한 것이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게다가 연말연초를 기해 실시하는 차기 대통령감 선호도 조사가 ‘밴드웨건 효과(타인의 선택에 따라 의사 결정이 영향 받는 현상)’를 불러일으키는 바로미터라는 점에서 고 전총리의 갈 길은 험난해 보인다.
하지만, 마음만 바쁠 뿐 고 전총리의 발걸음은 무거워 질 수밖에 없다. 일찌감치 노 대통령과의 결별을 은연중에 내비치며 차기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호남표심에 있다. 범여권 후보이든 통합신당 후보이든 대선 고지에 서기 위해선 호남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수 요건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 전총리의 12월 독자 신당 창당이라는 정계개편 구상이 정치권에 전해졌음에도 그 파괴력이 기대 이하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 해도 고 전총리의 DJ를 향한 몸짓이 요란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신중함을 빗대 ‘거품’, ‘반사이익’ 등으로 비난해온 정치권의 회의론을 딛고 정계개편의 첫 삽을 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고 전총리의 각오는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 전총리는 17대 대선 주도권과 18대 총선의 역학관계를 둘러싼 전·혁직 국회의원들의 주판알 튕기는 소리가 정계개편 전선의 기운을 북돋우고 있는 가운데, 동교동과 청와대, 우리당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결국, 그의 구상은 향후 정계개편 과정에서 주도권을 쥐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와 관련, 고 전총리 진영의 핵심인사인 김용정 전동아일보 편집국장은 “DJ를 만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물론, 자연스런 계기가 있어야 한다는 게 전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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