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 정부 출범 초기 정·재계는 극단의 대립적 상황을 맛보았다.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의 분식회계에 대한 검찰의 칼날은 정·재계에 차디찬 기류를 몰고 왔다. 재계는 거듭되는 경기 부진 속에서 정부의 정책 불확실성을 고리로 정부의 재계 길들이기에 대항했다. 경기 부양을 촉구하며 개혁의 예봉을 꺾기 위한 선수를 친 것. 이 같은 노력은 정권 출범 초기 매서운 힘을 내둘렀던 공정거래위원회의 각을 무디게 했고, 정부와 경제 살리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유화 무드를 조성해 냈다. 지난해 5월 대통령의 미국 방문때 총수들이 대거 동행하며 화해의 싹을 틔웠고, 국내에 돌아와서는 ‘삼계탕 회동’을 갖기도 했다. 화해의 맥을 이어준 또 하나의 고리가 ‘국민소득 2만달러’였다. 이는 참여정부의 핵을 이뤘던 분배론자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성장론자가 세를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동안 정책의 목표를 뚜렷하게 세우지 못했던 정부는 재계에서부터 등장한 2만달러론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로 세우고 재계와 아이디어 공유에 나섰다. 정부는 이어 수도권 공장 증설 등을 포함, 잇따른 규제 완화의 선물을 안겨줬다. 정·재계간의 관계 변화를 보여준 또 하나의 지표가 노사 관계다. 재계는 정권 출범부터 ‘친노(勞) 성향’에 대해 줄기차게 비판했다. 이정우 청와대 전 정책실장의 ‘네덜란드식 노사모델’, 즉 노조의 경영참여를 골자로 한 정부의 새 노사관계 모형은 재계의 강한 반발을 샀다. 현명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은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에는 한국형 모델이 맞다’며 정부가 추진중인 노사모델에 강하게 반발했고, 이는 노사정간의 대립무드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는 한국의 강성 노조에 대한 국내외의 거센 저항에 맞부딪쳤다. 급기야 노무현대통령은 ‘대기업 노조의 이기주의’를 질타하며 일정부분 재계의 손을 들어줬다.

이처럼 경제적 측면에서 어느 정도 코드 맞추기에 성공한 정부와 재계의 관계는, 최근 극단으로 치닫던 ‘대선자금 수사’에서도 ‘호기’를 맞이했다. 손길승 SK회장과 이중근 ㈜부영회장, 조양호 한진회장, 김준기 동부회장 등을 제외하고는 삼성, LG, 현대차, 롯데, 금호 등 주요 조사대상 그룹 총수들이 불기소된 것. 그러나 대선자금 수사가 마무리되더라도 분식회계, 비자금 조성 등 일반적인 기업비리에 대한 검찰의 수사는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특히 이번 정치자금 조사과정에서 분식회계나 대기업 오너들의 비정상적인 주식거래 등이 포착된 것으로 알려져 검찰이 이런 부분을 본격적으로 파헤치면 ‘제2차 기업사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더욱이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2기를 맞이하면서 강력한 개혁드라이브를 예고, 다시 한번 재계와의 대립관계에 놓일 것으로 보인다.

실제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기각 결정 다음날 발표한 대국민 담화에서 “경제 위기를 과대하게 부풀려 경제개혁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정치권 인사들은 이 발언이 재계에 대한 유감의 표명이라고 보고 있다.노 대통령은 자신이 탄핵을 받아 제대로 국정을 돌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의식해 주요 그룹 총수들이 몇 개월 동안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경제에 상당한 책임을 져야 하는 총수들이 그런 식으로 검찰 눈치나 살피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냐는 식으로 화를 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는 “탄핵소추안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기 전, 노 대통령은 이런 때일수록 그룹 총수들이 확실하게 정부를 믿고 국내 투자 등 사업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데, 자꾸 전경련을 앞세워 뒤에서 정부의 재벌개혁을 방해하려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김우식 비서실장이나 이헌재 부총리 등에게 상당한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이와 관련, 노무현 대통령은 재계 총수들과 회동을 갖고, 경제 개혁에 대한 의지를 밝히는 한편 이에 동참하지 않는 재계 그룹들에는 강력하게 제동을 걸 것이라는 경고 메시지를 전달할 것으로 알려졌다.반면 노 대통령의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받은 재계총수들이 어떠한 대응을 하게 될지도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분배 위주, 경제개혁 위주의 정부 경제정책에 제동을 거는 강경 대응으로 임할 것인지, 혹은 노 대통령의 경고를 겸허히 수용해 ‘개혁 드라이브’에 동참하게 될 것인지 말이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