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에서 여성 서울대 출신, 그리고 국회의원에 대한 편견은 무엇일까? 늘 양지만 찾아 고도의 언론플레이나 일삼는 ‘공주족’ 혹은 말은 근사하게 하지만 실제 행동은 유리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그런데 심상정 당선자는 살아온 과정이나, 당선자 신분으로서 행동하고 말하는 것에서 우리의 편견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신선함을 가지고 있다.그의 얼굴은 완전히 마음을 비운 사람 특유의 광채로 빛나고 있다. 1959년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한 심 당선자는 서울 명지고를 거쳐 78년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입학했다. 재수한 끝에 서울대 합격 통지서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심 당선자는 “자식 네 명이 15번에 걸쳐 입시를 치르느라 부모님이 죽도록 고생했다”고 말하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 해맑은 웃음은 그가 맹렬 노동투사전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한다. 그가 입학한 78년은 유신독재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때라 그 역시 자연스럽게 이념서클 <대학 문화 연구회>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이 서클 출신 중에 한나라당 김충환 당선자와 청와대 성경륭 비서관이 있다. 누구 못지않은 외모에 매력적인 목소리, 그리고 사회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수많은 남학생을 홀린(?) 전력을 가지고 있다며 수줍게 웃는다.80년대에 학도호국단 산하 여학생회를 설립하고, 이 조직을 총여학생회로 발전시킨 장본인이 심 당선자다. 또 구로동 야학에서 노동자들을 가르치면서 노동자와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됐다.

박정희 정권의 개발독재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으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노동 현실에 분노를 느꼈고, 이때부터 평생을 노동 현장에서 살기로 결심했다는 심 당선자. “나는 노동자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우리 사회의 주인은 노동자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이들이 사회의 주인으로 나서야 한다고 믿었다. 한강의 기적이다 뭐다 하여 개발독재를 칭찬하는 분위기였지만 당시 노동자의 처지는 비참했다. ‘이건 아니다’라는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이런 의식화 과정을 거쳐 그는 본격적으로 노동 현장에 뛰어든다. 80년 남성전기 노조 교육부장을 시작으로 대우 어페럴, 구로동맹파업을 조직했고, 서노련 중앙위원장을 역임했다. 87년에 조직된 전노협 쟁의국장과 조직국장을 거쳐, 96년 금속연맹 사무처장과 사무차장을 지냈고,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하다 이번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하게 됐다.

그는 92년 결혼, 슬하에 아들(12) 한명을 두고 있다. 남편과 아들은 매스컴에 나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 아직까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늦게 결혼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심 당선자는 “내가 일했던 금속연맹에서 주로 상대했던 노동자는 40대 남성이었다. 그런데 그 당시 여성 노동자는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둬야 했기에 남성 노동자는 여성을 동지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평생 노동 운동을 해야 하겠다고 마음 먹었기에 결혼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심 당선자는 “국회에서 빈곤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하는데 노력하겠다”며 각오를 다진다.

“조세개혁을 하면 가능하다. 지금 탈세가 너무 심한데 그것을 바로 잡고, 부유세 등 종합적 세제 개혁을 통해 재원을 마련하고, 그것을 빈곤층에 나누어주겠다”며 방안까지 제시하며 당찬 포부를 밝혔다. 혹시 노무현 정부의 노동관계직책에 협조할 마음 없냐는 질문에 그는 “곧 민주노동당이 집권할텐데 뭣하러 들러리 서겠냐”며 해맑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결코 노동운동가로서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그의 각오가 흰소리로 여겨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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