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대통령(YS)의 심기가 어느 때보다 불편하다. 안풍사건 2심 결과 때문이다. 재판부가 강삼재 전의원과 변호인단의 주장을 받아들여 신한국당에 건너간 안기부 자금을 YS의 통치자금 또는 대통령 당선 축하금의 성격으로 파악, 강 전 의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때문에 안풍사건의 모든 화살이 YS에게 쏠리게 됐다. 따라서 YS의 분노도 그 어느 때보다 강경하다는 게 한나라당 관계자의 전언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정치자금과 관련, YS의 폭탄발언이 나올 것이란 관측까지 나돌고 있다. 근래들어 YS는 상도동 자택에 주로 머무르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에 비해 외출이 잦았던 YS이지만, 최근 그의 행보는 조용하기만 하다.

매일 아침 집 뒷산에 있는 배드민턴장에서 동네 사람들과 배드민턴을 치는 것이 최대 즐거움이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배드민턴장에 얼굴을 내민다.안풍사건 2심 결심 이후 기자들이 배드민턴장을 찾았지만, YS는 “말 안할끼다”며 질문에 입을 굳게 다물었다. YS는 비교적 낙천적인 성격이다. 야당 총재시절부터 숱한 외풍을 이겨온 YS였기에 웬만한 정치적 사건에 대해 ‘초연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최근 YS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대통령직을 퇴임한 뒤 여러차례 정치적 좌절을 맞본 YS이지만, 이번 안풍사건은 또 다른 정치적 위기이기 때문이다. 자칫 검찰 조사를 받을 가능성도 대두된다. 검찰에 직접 출두하지는 않더라도, 검찰의 방문조사 가능성은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YS가 ‘권력무상’을 절감하고 있을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한나라당 고위 관계자는 “YS가 정치권의 중심에 서 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충성 맹세를 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며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YS와 등진 경우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YS는 강삼재 전 의원 때문에 낙심하고 있다는 게 상도동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의 말이다. 강 전의원은 YS가 한 때 가장 신임했던 사람이었다.문민정부 때 YS는 40대 의원인 강 전의원을 신한국당 사무총장에 임명했다. 당시엔 파격 그 자체였다. 문민정부 최장수 사무총장을 지낸 강 전의원은 ‘무소불위’의 권력가였다. 사무총장 앞에서 문민정부 장관들도 벌벌 떨 정도였다. 신한국당을 장악하고 있는 강 전의원에 대한 YS의 사랑이 남달랐다는 게 당시 집권당에 몸담았던 관계자의 말이다.

신한국당 사무총장이었던 강 전의원이 청와대에서 YS를 만났을 때의 일화는 아직도 정치권에 회자되고 있다. 청와대를 방문한 강 전 의원을 보고 YS가 “요즘 상황이 어떻노”라고 물은 뒤 지갑을 내밀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멈칫하고 있던 강 전 의원의 지갑을 빼앗은 YS가 자신의 지갑에 있던 돈 전부를 빼내 강 전의원의 지갑에 채워줬다는 일화는 유명하다.이처럼 YS는 강 전의원에게 남다른 정치적 애정을 가졌다. 그 애정 덕분에 강 전의원은 정치적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강 전의원에 대한 YS의 서운한 감정이 클 수밖에 없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말이다. 여기다 최근 YS의 감정이 격앙된데는 한나라당과의 관계도 한몫하고 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한나라당 창당의 1등공신인 YS 자신을 전혀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감정 때문에 YS의 폭탄발언 임박설이 무게를 더하고 있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YS의 아들 현철씨의 총선 공천문제, 김덕룡 원내대표의 정치행보에 대한 서운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YS가 한나라당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안풍사건과 관련, YS는 한나라당의 전신인 신한국당에 ‘돈을 걷어준 것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박근혜 전대표의 정치행보에 대한 감정도 YS를 자극하는 한 요인이 될 것이란 게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의 말이다. “YS는 퇴임 후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적 각을 세워온 사람이다. 특히 대북 햇볕정책에 대해 그동안 많은 비판을 해 왔다. 그런데 박근혜 전대표가 김대중 전대통령의 대북정책을 인정, 사실상 YS정책과 정반대의 정치행보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실상 한나라당과는 완전히 갈라선 상태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YS가 한나라당뿐 아니라 과거 민주계 인사들에게 섭섭한 감정을 충분히 가질 수 있다.”상도동 소식에 정통한 관계자는 “지금의 한나라당이 만들어진 뿌리가 신한국당이다. 신한국당을 위해 YS 자신이 모든 것을 지원했는데도 지금의 한나라당 지도부나 현역 의원들이 안기부로부터 국고를 횡령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는데 급급하고 있다”며 “YS의 불법 통치자금 운영을 기정사실화 하려는 태도를 보인 것에 실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강경론도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다. “이대로 마냥 당할 수는 없다”는 게 일부 상도동 측 인사들의 생각이란 것이다. 상도동 측에서 강경론을 들고 나온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나라당 일부 중진 의원들의 목을 옥죌 수 있는 카드를 쥐고 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한나라당 중진인 K, P, L 또 다른 중진인 K 의원 등이 주요 타깃이란 말도 나돈다. 김영삼 전대통령 집권 때 어느 누구보다 YS의 도움을 많이 받은 의원들이어서 이미 폭로카드는 마련되어 있다는 말까지 정치권에 나오고 있다. YS로부터 제공받은 정치자금 공개가 ‘폭로카드’인 셈이다. 신한국당 때 YS로부터 정치자금 지원을 받은 중진 의원들을 공개하는 카드가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정치자금 공개와 관련, ‘온건론자’도 상당수 존재한다. 정치자금 공개로 자칫 YS가 검찰에 불러나가 조사를 받는 ‘수모’를 겪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경론과 온건론이 공존하고 있는 게 최근 상도동의 분위기다. 따라서 강경론 측의 주장처럼, 당장 정치자금을 공개하기는 힘들 것이란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하지만 YS가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면 상황은 급반전 될 수도 있다. ‘온건론자’들의 주장보다 ‘강경론자’의 주장이 훨씬 설득력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풍사건과 관련, YS의 향후 정치적 행보는 검찰의 수사과정이 그 키를 쥐고 있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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