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차단, 봉쇄작전

증언자: 화순-장재철 전정일 등※나주-김재홍 왕태경 등 담양- 최열락 채종일1980년 5월21일 광주시에서 퇴각한 계엄군은 시 외곽지역에 주둔지를 정하고 광주를 다른 지역과 차단, 봉쇄하는 작전을 펼친다.송정리 방면으로 통하는 화정동, 화순 방면의 지원동(주남마을), 목포 방면의 송암동, 여수·순천 방면의 문화동, 31사단 방면의 오치동, 장성방변의 동운동, 광주교도소 일대 등 7개 주요지점에 군이 재배치되었다. 21일 20시를 기해 광주시 외곽지역은 계엄군에 의해 완전 장악되어 타 지역과의 왕래가 일절 불가능해졌다. 계엄군의 만행에서 벗어난 광주시가 평화로운 해방의 도시였던 반면, 시 외곽에서는 계엄군의 만행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주남마을, 송암동, 화정동 양민학살이 모두 5월 22일부터 24일 사이에 외곽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뿐만 아니라 아들딸을 찾아 광주로 들어오거나 광주를 벗어나는 피란민들에게까지 계엄군은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승용차에 백기를 꽂고 가거나 그들의 요구에 따라 일단 정지한 사람들에게도 막무가내였다. 시위를 확산시키고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각 지방으로 오가던 시위차량들이 집중공격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거나 부상을 당한 것은 물론이다. 남평으로 가는 길목에는 차들이 길가나 논바닥에 처박혀 있고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고 한다. 피란민들과 영암·나주·목포 등지로 나갔던 시위차량들이 5월 21일 밤부터 돌아오다가 공격을 당한 것이다.

미니버스 타고 가다 총격받고 사망한 여고생 박현숙씨

증언자 : 박현숙의 언니 박현옥 당시 나이; 18세 ※직업; 고등학교(현재 사망)조사일시 : 1989년 1월1980년 5월 22일 오전 10시. 현숙이는 쌀을 구해야겠다면서 남동생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앞을 지나가던 봉고차를 타고 도청으로 나간 뒤 현숙이는 잠깐 누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한참 후 돌아온 그 애는 다시 차를 타고 효죽동 파출소 앞에 오더니 동생을 내리게 했다. 자기는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동생에게는 집에 들어가라고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현숙이 친구 말을 들어보니 그날 밤은 친구 한 명과 여관에서 잠을 자고 23일 정오가 다 되어서 미니버스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그날 같이 차에 탔던 홍금순에 의하면 차에는 현숙이 등 여학생 서너 명과 학생으로 보이는 남자를 포함해 모두 18명이 타고 있었는데 모두 총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화순 방면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미니버스가 주남마을을 조금 지났을 때였다. 산 속에 숨어 있던 계엄군 중 한 명이 도로로 내려와 차를 제지했다. 그러자 미니버스 운전사는 더욱 속력을 내 앞으로 달렸다. 무장한 채로 계엄군에게 잡히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얼마 못가서 계엄군으로부터 사격을 받기 시작했다. 차에 있던 몇 사람이 계엄군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 순간 총알이 차바퀴에 맞아 차가 멈췄다.

그후로도 총알이 계속 날아오자 남자들은 총을 머리 위로 올린 다음 항복 의사를 표명했다. 여학생들은 손을 흔들며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계엄군의 사격은 멈추지 않았다. 항복도 할 수 없게 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차 바닥에 엎드렸다. 대부분 총에 맞았기 때문에 차 안은 신음 소리와 살려 달라는 아우성 소리로 가득 찼다. 홍금순의 말에 의하면 현숙이는 살려 달라고 애원하면서 누구보다도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그때 18명 중 15명이 그 자리에서 현숙이처럼 고통받으며 죽었다고 한다.

계엄군에게 총격받은 윤영화씨의 5.18

증언자; 윤영화(남)당시나이; 36세※직업; 이발사 조사일시; 1988년 11월1980년 당시 나는 진월동 개방대학 입구에서 이발관을 하고 있었다. 5월 24일 집 앞 삼거리에서 동네사람들과 이야기하다가 점심때가 되어 일어서는데 난데없는 총소리가 나면서 총알이 날아왔다. 바로 앞이 우리 집이었지만 뛰어가지 못하고 제일 가까운 집으로 들어갔다. 총알에 맞은 유리창이 깨지면서 파편이 오른쪽 팔뚝에 수없이 박혀 입고 있던 흰옷이 빨갛게 물들었다. 잠시 총소리가 뜸하더니 계엄군들이 문을 열어 젖혔다. 총을 겨누며 나오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데모한 사람이 아니다. 이 동네 살고 있다”고 했지만 앞 뒤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기만 했다. 얼마나 맞았던지 피곤죽이 된 나를 옆구리에 총부리를 대고 지프차에 태웠다.

나를 태운 차는 광주-목포간 도로에 진주한 계엄군이 있는 곳에서 멈췄다. 차에서 내리자 그곳에 있던 계엄군들이 무수히 달려들어 또 때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가슴이 부어오르고 온몸의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다. 그곳에는 이미 같은 마을의 최철진, 김행남, 김영묵씨 등이 끌려와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몰골은 눈뜨고는 도저히 못 볼 지경이었다. 총에 맞아서 쏟아지는 피로 인해 땅바닥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중략- 눈을 가려 어딘가로 끌고 가더니 한참을 더 구타한 후 헌병대 영창에 넣었다.

그날부터 조그만 사무실로 불려 나가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주로 “총을 쏜 사실이 있느냐 없느냐, 몇 사람이나 죽였냐는 것이었다. 나는 총을 쏘지 않았으므로 “아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장소를 옮겨 교회에서 조사를 받을 때도 질문내용은 항상 “너 총 쐈지? 몇 명 죽였나?”였다. 나는 “아니”라고만 대답하며 끝까지 버티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때리던지 그 고통을 참느라고 혼신의 힘을 다해 이를 악물었다. 잡혀간 지 13~14일 만에 풀려났다.

5월 25일 서울에 뿌려진 유인물

- 한 조선대생이 참상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가지고 온 유인물을 서울대 총학생회가 서울시내 일원에 배포한 유인물중 일부아! 민족사의 대비극이다. 하늘은 이리도 무심하단 말인가! 신성한 국토방위의 의무를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군인이 제2의 거창 양민학살사건을 자행하고 있다. 이것은 온 국민이 가슴을 두드리며 통곡할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5월 17일 밤을 기해 전두환과 그 일파는 기존의 비상계엄을 더욱 강화하고 자기의 뜻에 거슬리는 모든 정치인, 민주시민들을 체포·구금함으로써 이 나라 백성들이 기대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한 가닥의 희망까지도 말살하고 말았다.

이에 분노한 전남 광주의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를 비롯한 각 전문대학과 일부 고등학생·민주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에 대해 3만여 명의 전투경찰을 동원하여 시민들의 앞과 뒤를 막아 페퍼포그를 쓰면서 포위망을 좁혀 오고가지 못하게 하고, 서울에서 급파된 3,000여 명의 공수특전단들은 대검을 빼들고 미친 망나니처럼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다 내던지고, 그것도 부족하여 달아나는 시민들과 어린 여학생들을 대문까지 부수고 끌어내어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대검으로 난자했다. 이러한 만행에 온 시민들은 치를 떨며 저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맨손인 시민들은 도리어 칼질을 당했고, 손녀 같은 여학생이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보고 공수부대의 멱살을 잡은 70 노파는 도리어 칼로 찔리어 죽음을 당했다. -중략- 전두환의 친위대 공수특전단에 의해 무참히 살육당한 광주시민의 참상을 필설로써 설명할 수 없고 눈뜨고는 볼 수 없었으니, 나이먹은 어른들은 하나같이 6·25때 인민군들도 이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고 통탄했다. 지금 광주에서는 젊다는 이유 한가지만으로 죄가 되어 생명을 잃어야 하거나 병신이 되어야 하는 처절한 운명에 놓여 있다. “광주 시민 70%는 죽여도 좋다”“개 몇 마리 잡았냐?”. 이 이야기는 공수특전단의 입에서 구호처럼 나온 이야기다.

당시 김추기경 “학생들 군 불신때문에 데모”

1980년 6월 5일제목 : 김수한 추기경 동정본인은 광주 소요 사태로 인한 피해 상황 청취차 1980년 6월 4일 14시 가톨릭 센터에서 부지사, 전교사 부사령관, 윤공희 광주대주교, 황민성 대전 대주교 등과 다음과 같은 간담회를 가진 후 6월5일 상경 예정.
<간담회 내용>
윤 대주교 : 5월18, 19일 데모대에대한 공수부대의 과잉단속 현장을 목격했다. 현사태를 수습하려면 군에서 과잉진압에 대한 사과를 해야한다.
황 대주교 : 이번 사태의 원인은 2가지 있는데, 하나는 계엄군의 과잉진압이고, 또 하나는 김대중을 공산당 취급, 구속한 데 있으므로 금번 광주 소요사태는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인 것 같다.
김 추기경 : 4·19때는 학생들이 군에 친근감과 기대감을 가졌는데 금번 학생들이 데모하게 된원인은 과잉단속, 정치발전 등이 기대에 어긋나고 군을 불신한 데 원인이 있는 것 같으므로 군의 신뢰를 회복해서 잘 해결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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