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공개된 북한의 새 형법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우리 정보 당국이 입수한 이 형법은 지난 4월에 개정된 것으로 이를 통해 북한 사회상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그런데 여기에는 과거에 담기지 않았던 새로운 처벌조항이 있어 우리 정부 당국자와 전문가들의 주목을 받았다. 바로 “퇴폐적이고 색정적인 음악이나 춤 사진 녹화물(비디오테이프) CD를 반입·유포 하거나 이를 반복적으로 듣고 본 사람은 2년 이하의 노동 단련형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당국은 이를 토대로 북한이 음란물을 비롯한 성적인 타락현상이 더 이상 쉬쉬하고 넘길 수 없는 상황에까지 도달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관계당국과 탈북자들의 언급에 따르면 북한에는 음란비디오와 CD의 유입이 급속히 이뤄지고 있다. 중국과 국경도시인 평북 신의주나 함북 무산·회령시 등이 주요 반입루트다.

조선족과 북한인이 결탁한 조직적인 밀반입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북한 군부가 외화벌이를 위해 이들의 뒤를 봐주다가 북한당국의 단속에 걸려 정치범 수용소까지 끌려간 경우도 있다는 얘기다.80~90년대에는 음란비디오 테이프나 음란서적의 유입이 주로 재일교포나 외국을 드나드는 상사원·외교관 등 특권층에 몰려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밀수 조직을 통해 일반 주민들은 물론 청소년들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다는 것이다.그러다보니 웃지 못할 일도 생긴다.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우리의 국가정보원)나 인민보안성(경찰)은 음란비디오를 보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냈다고 한다. 음란비디오를 보고 있다는 신고가 들어와 현장을 출동해도 막상 방안에서 은밀하게 이뤄지는 행위를 잡기도 어렵고 증거를 확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게 ‘정전 후 덮치기 식 단속’이다.

즉, 비디오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밖에서 두꺼비집을 내려 정전을 만드는 것. 비디오의 특성상 테이프를 보던 중 정전이 되면 테이프를 꺼낼 수 없게 돼 꼼짝없이 현장을 잡힐 수밖에 없다는 것. 음란물이 꽉 끼여있는 따끈따끈한 비디오 기기는 누구도 부인 못할 증거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젖소부인 바람났네’ 시리즈 같은 고전물들이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서 나온지 좀 오래돼 물이 가긴 했지만, 북한에서는 뒤늦게 히트를 친 명작들이 많다고 한 탈북자는 전했다. 같은 비디오 테이프라도 ‘기쁨조’ 시리즈 같은 김정일 체제와 관련한 민감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더 은밀하게 높은 가격에 거래됐다고 한다.하지만 요즘에는 웬만한 비디오 테이프는 서울에서 나온지 2~3개월만에 구해볼 수 있다고 한다.

한국과 중국을 오가는 관광객이나 보따리상들이 급증한데다 연변 등 조선족사회에 한류바람과 함께 한국의 화끈한 비디오테이프가 넘쳐 나면서 유입이 손쉬워졌다는 얘기다. 북한에는 아직 CD가 일반화 되지 않아 비디오테이프 버전이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의 당간부 등 고위층이나 대학생·연구원 등 인테리 계층은 컴퓨터 문화에 이미 친숙해져 CD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상류층들은 음란 성행위 도구까지 반입하려다 들켜 신세를 망친 사례도 있다고 한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해외 공무출장을 다녀오는 핵심계층의 경우 짐검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외부 음란사조나 체제위해 요소의 유입을 막기 위한 특별조치로 인해 재수없게 걸려드는 당간부 등이 적지 않다고 한다. 이들 핵심 상류층은 한국의 비디오·CD보다는 플레이보이 시리즈 등 서양의 것을 선호해 주민들은 “당간부 놈들이 더 미 제국주의 걸 좋아한다”며 비아냥 거린다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풍속도 급격히 타락하고 있다. 북한의 새 형법이 집단으로 음란한 행위를 할 경우에 대한 처벌 조항을 신설한 것은 그룹섹스나 스와핑 같은 현상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란 게 정부 당국의 판단이다. 또 새 형법에 직장상사가 직위를 이용해 여직원이나 부하를 성추행하는 경우에 대한 처벌을 담은 것도 이런 취지라는 것이다. 한 탈북자는 “북한에서는 소위 부화사건이라 부르는 성행위 문란과 간통행위 등이 번지고 있어 보안성이나 당비서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난으로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여성들이 좋은 직장을 부탁하거나 돈벌이나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해 당간부나 직장상사에게 몸을 파는 경우가 있다는 설명이다.음란 비디오 테이프나 CD외에 한국가요의 상륙도 문제로 부상했다. 북한당국의 단속과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일반 주민들 사이에서 점차 퍼져나가는 남한가요는 그 종류가 제한되고 시간차이가 있지만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가고 있다는 게 귀순자들의 증언이다.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요는 ‘사랑의 미로’와 ‘타향살이’가 꼽힌다. ‘사랑의 미로’는 가사가 일부 바뀌긴 했지만, 김정일의 애창곡인데다 평양서 최근 발간된 ‘외국 민요집’에 수록돼 있어 실제로는 북한서 공인된 거의 유일한 ‘남한가요’로 파악되고 있다. 이밖에 동요 ‘고향의 봄’ ‘아침이슬’ 등이 널리 불리는 노래에 속한다.이처럼 남한의 가요가 북한에서 불릴 수 있게 된 데는 청소년층의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크게 작용했다. 특히 이들 대부분이 간부들의 자제라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유행에 민감한 북한 청소년들은 단조로운 혁명가요에 염증을 느껴 남한가요를 찾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이른바 ‘10대 권장가요’는 외면받고 있다. 10대 권장가요는 말 그대로 가장 혁명성이 뛰어나다는 10곡의 북한 가요다. 빛나라 정일봉, 백두밀영의 고향집 등 김정일 체제를 선전하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노래다.

윤수일의 ‘아파트’, 김범룡의 ‘바람 바람 바람’ 등은 남한에서는 이미 한물간 노래지만 북한에서는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노래들은 주로 중국의 연변동포들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가 북한에서는 ‘연변가요’라는 은어로 불리고 있다. 북한당국도 이같은 남한가요문화의 유입에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노동당 비서 최태복은 과거 비공개리에 행한 한 연설에서 “압록강 주변은 물론 김일성 수령 동상 밑에서도 남조선의 민요는 물론, ‘최진사댁 셋째딸’ 등 남조선 가요를 틀어놓고 사교춤을 추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 “양강도 주민들이 영문자로 표기된 옷을 입고다녀 거리를 지나다보면 홍콩에 들어간 느낌이 든다”며 “도 보위부 조사결과 혜산시 주민들이 각 가정마다 남조선 노래 테이프를 1~2개씩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당국은 이같은 문제점에 대응하기 위해 청소년층에 대한 사상교육도 강화하는 등 부심하고 있다. 청소년들이 이색적이고 퇴폐적인 노래를 부르면 “적들의 사상문화적 침투에 말려들어 적들에게 농락된다”는 것이다.그러나 새로운 유행을 찾는 청소년층의 욕구가 가라앉지 않는 한 남한가요의 북한내 유입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북한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김정일 체제의 폐쇄성에도 불구하고 북한체제의 문을 두드리는 문화개방의 파고는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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