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23일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실었다. 독도문제와 교과서 왜곡문제로 극도로 예민해진 국민들의 반일감정을 틈타 노 대통령은 ‘일본과의 외교전쟁’을 선언했다. 노 대통령의 이 선언은 국내 외교가는 물론, 한·미·일로 구축된 한국 외교라인의 축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특히 앞서 노 대통령은 육사졸업식에서 한·미·일 외교라인의 기반과 더불어 한·북·중의 라인도 구축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른바 신 3각외교라인의 필요성도 강조한 바 있다. 이 부분은 노 대통령의 외교전쟁 선언과 맞물려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노 대통령이 한국 외교의 근본을 뒤흔든 ‘대일 외교전쟁 선언’을 준비한 것은 일본 시마네현이 독도의날 조례제정안을 통과시킨 지난 3월16일이었다. 이날부터 23일 외교전쟁 선언이 나오기까지 7일간 벌어진 노무현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외교통상부 사이에 벌어진 숨막혔던 내부 움직임을 알아본다.노무현 대통령이 ‘일본과의 외교전쟁’을 선언한 배경은 지난 3월초로 거슬러 올라 간다. 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일본에 대해 ’배상’문제를 처음으로 언급하며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요구했다.이에 대해 일본의 고이즈미(小泉) 총리는 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을 즉각 ‘국내용’으로 폄하했다. 이같은 고이즈미 총리의 대응이 알려지자 당시 청와대 참모들은 ‘과연 일본을 우리와 함께 나갈 미래지향적인 동반자로 인정을 해야 하느냐’면서 상당히 격앙된 분위기였다.

물론 이 사실을 보고받은 노 대통령도 고이즈미 총리의 반응에 대해 상당히 언짢은 표정이었으며, 뭔가 많은 고민을 하는 모습을 때때로 나타내곤 했다. 노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중 일본에 관한 부분은 처음에는 외교부 아태국장이 초안을 잡았다. 이 초안내용에는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배상’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내용을 본 노 대통령은 최종단계에서 직접’배상’이라는 단어를 집어 넣었다. 노 대통령이 이처럼 ‘배상’이라는 단어를 직접 넣은 것은 일본 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제정과 역사교과서 문제 때문에 국민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어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 한복판에서 있었던 다카노 주한 일본대사가 노 대통령의 기념사 발표를 전후해 공식적으로’다케시마는 일본땅’이라는 발언을 하고 나선 부분은 노대통령을 상당히 자극했다.

이어 3월 7일 청와대에서는 수석비서관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관례를 깨고(대부분 수석비서관회의에는 대통령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드물다) 노 대통령도 직접 참석을 했다. 노 대통령은 이 회의에서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측의 태도에 대해 강력히 비난을 하며 대책을 지시했다. 이날 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일본측의 태도가 비열하다”며 일본을 맹비난했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지시에 따라 청와대는 물론 외교부 등 한국 외교정책라인들은 총동원돼 대책마련에 즉각 착수했다. 반기문 외교부장관은 3월 12일, 조세형, 최상룡 전 주일대사 등 전직 주일대사와 한일관계 전문가 몇명을 급하게 외교부로 불러 오찬을 함께 하며 이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이 자리에는 한일외교와 관련된 전현직 전문가 및 외교관련 교수들도 참석했다.이 자리에서 반 장관은 3월 16일로 예정되어 있던‘시마네현의 독도의 날 조례안이 통과되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은지 의견을 말해 달라’고 조언을 구했다.

특히 반 장관은 또 “독도문제와 관련해 청와대의 입장이 상당히 강경하다”며 “2001년 때처럼 아무래도 주일대사를 소환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의견을 냈다. 이에 대해 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주일대사의 소환은 자칫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으니 신중을 기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이날 모임에서 반 장관은 한일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는 상황에 대해 몹시 괴로워 하는 표정이었다. 실제로 반 장관은 이날 모임에서 “핵문제 등으로 한일관계가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다. 강경책보다는 대화를 통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융화책을 제시했다. 반 장관은 청와대의 강경 분위기와는 다른 생각을 나타낸 것이었다. 반 장관은 이날 모임에서 전문가들이 밝힌 내용을 청와대에 그대로 보고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반 장관의 이같은 입장에 매우 못마땅해 했다. 노 대통령도 반 장관의 보고내용을 비서진을 통해 보고받고는 벌컥 화를 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3월 14일 청와대에서는 노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서 반 장관은 역시 유화책인 대응책을 제시하며 “(독도문제 등 일본과의 외교관계에) 냉정히 대처할 필요성이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반응은 차가웠다.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반 장관의 이같은 태도를 보고는 약간 화가 난 어투로 반 장관과 외교부의 자세를 지적하는 한편 국무회의 시간동안 독도문제에 대한 일본측의 태도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며 비난성 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은 심지어 조목조목 일본측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외교부와 청와대 외교안보라인측이 당당히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요구했다.

문제의 날인 3월 16일, 일본 시마네현은 가장 우려스러운 문제인 ‘독도의 날’ 조례안을 지방의회에서 통과하고 말았다. 이날 조례안 제정은 한국 국민은 물론 청와대와 외교부를 초긴장시켰다. 노 대통령은 이 사실을 보고받고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즉각 ‘대일 독트린’을 발표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정동영 통일부 장관 겸 NSC 상임위원장은 17일’대일 신독트린’을 선언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대일 신독트린’이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측의 반응이 상당히 미온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본측의 반응을 접한 청와대 참모들은 물론 노무현 대통령마저도 상당히 불쾌하다는 반응이었다.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은 ‘이 정도로도 안되겠다’는 판단을 내리고 다른 방안을 찾기에 이른 것이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3월 18일 저녁 정동영 통일부 장관,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 조세형·최상룡 전 주일대사 등을 청와대 관저로 초청, 이들의 의견을 들었다. 이 자리에서도 정 장관은 강력한 대응을 주문했지만 나머지 참석자들은 ‘신중하고 냉정한 대응’을 요구했다. 이날도 노 대통령은 이같은 반 장관 등의 신중한 대응책 요구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노 대통령은 뭔가 자신의 입장이 이미 정리된 것 같았다는 것이 이날 참석자들의 반응이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다음날인 19일부터 자신의 입장을 틈나는 대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입장을 정리하면서 주로 권진호 국가안보보좌관과 이종석 NSC사무차장의 의견을 참고로 했다.

물론 노 대통령의 입장정리에 외교부의 입장이나 의견은 거의 배제를 했다. 때문에 외교부는 노 대통령의 글(‘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사전에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그러니까 청와대가 완전히 주도를 한 것이다. 노 대통령은 지난 3월20일 콘돌리사 라이스 미 국무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독도문제에 대해 약 15분간 정도를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독도가 오래 전부터 한국의 영토였다는 사실과 일본이 불합리하게 독도 영토권을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이런 노 대통령의 적극적인 독도설명으로 이날 회담은 당초 예정돼 있던 시간보다 훨씬 늦게 끝났다.

라이스 국무장관과의 회담을 끝낸 뒤 ‘국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제목의 ‘대일 외교전쟁 선언’ 내용을 최종 정리했다. 마지막 문구작성에는 이종석 사무차장과 윤태영 부속실장이 참여했다. 이종석 사무차장이 문구를 검토하고, 윤 부속실장은 발표내용의 자귀를 하나하나 검토했다.마침내 이 글은 23일 청와대 게시판에 올랐고, 언론에도 배포되었다. 이 글이 발표된 후 국내 외교가는 들끓었다. 사실상 외교전쟁을 선언하는 초강경 입장이 담긴 이 글은 국내외 외교가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외교사에서 그동안 일본과의 많은 마찰이 있어왔지만 대통령이 직접 나서 외교전쟁을 선언하는 글을 내놓기는 유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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