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외 아들…이원만 회장 쓰러지자 미국 입양 보내져가족들 상속 포기각서 받아내 … “억울하다”소송제기코오롱 그룹이 소송에 휘말렸다. 소송 내용은 다름 아닌 자녀 문제. 그룹의 가족들이 창업자의 자녀를 강제로 해외에 입양시켰다는 것이다. 코오롱 그룹의 창업자인 고 이원만 회장의 자녀는 모두 9명이다. 그러나 그룹에서는 현재 7명만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있다. 8번째 딸과 막내 아들은 코오롱의 가족에서 제외된 상태다. 이에 막내 아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았다.지난 해 11월 말 LA타임스는 “코오롱그룹의 창업주 고 이원만 회장의 혼외 아들 이동구(26·미국명 피터 로치)씨가 코오롱그룹과 5명의 배다른 형제를 상대로 500만달러(약50억원)의 상속재산을 요구하는 소송을 미국 캘리포니아 지방법원에 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다음은 이 신문에 게재된 내용.

이 신문은 고 이 회장이 1977년 서울의 한 요정에서 접대부로 일하던 이미연씨를 처음 만났으며 이듬해 동구씨를 낳았다고 전했다. 또 두 사람이 만났을 당시 고 이 회장은 72세의 기혼남이었고 이씨는 18세였으며 고 이회장은 이씨에게 거처를 마련해주는 한편 매달 생활비와 양육비를 대줬다고 동구씨의 출생, 성장 과정 등을 자세히 다루었다.이씨는 동구씨가 4살 되던 해에 동구씨를 고 이 회장 집으로 보냈다. 이씨는 동구씨가 고 이 회장집에서 좋은 환경 속에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동구씨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생활했고 한번은 사탕을 훔쳐먹다 들켜 계모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신문은 전했다.1985년 고 이 회장이 뇌출혈로 쓰러지자 동구씨는 고아원에 보내졌다.

이후 동구씨는 홀트아동복지회를 거쳐 미국의 마틴 로치씨 부부에게 입양됐다. 고 이 회장이 1994년 숨지자 고 이 회장 측은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동구씨의 양부모에게 연락을 했다. 고 이 회장 측은 양육비로 10만달러를 주는 대신 상속과 관련해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아냈다고 한다. 당시 16살이었던 동구씨는 나중에야 이 사실을 알게 됐다.이후 동구씨는 가족들과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그는 지난 해 8월에 캐나다 밴쿠버에서 생모인 이씨와 상봉했다. 동구씨와 생모 이씨의 만남은 22년만이다. 창업주의 아들로 태어나 버림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동구씨 외에 또 한 명이 있다.

바로 동구씨의 누나인 정현씨다. 정현씨는 현재 생모와 함께 스웨덴에서 살고 있으며 고 이 회장이 사망한 후 동구씨처럼 계약서를 작성했다. 유학비 명목으로 10만 달러를 받는 대신 친자소송 등을 못하게 하는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정현씨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한국으로 불려가 계약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최근 동구씨는 YTN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어머니가 있는 한국에 가고 싶었고 밤에는 무서워서 불을 켜놓고 잠을 잤다”며 “엄연한 가족인데도 해외에 강제입양 시켰고 그 과정에서 심각한 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또 동구씨의 변호인 김 률 변호사는 “모든 것이 다 밝혀진 상태에서 그룹 가족들은 계속 사실을 숨기고 법적논리만 앞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코오롱 그룹 가족들을 원망하기는 동구씨 뿐 아니라 그의 생모, 정현씨, 정현씨의 생모도 마찬가지다. 동구씨의 생모 이씨는 “동구는 이 회장의 마지막 자식이다”며 “생각만 하면 그 집에 가서 불을 지르고 싶다”고 한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심경을 토로했다. 또 정현씨의 생모 지은주씨는 “아이들을 그냥 돈 1억으로 처리하려하는 그 자체가 기분 나쁘다”고 전했다.코오롱 측은 이에 대해 결과가 나오면 답변하겠다는 신중한 반응이다. 그룹 측은 “본건은 이미 오래전 돌아가신 분의 일이어서 주위에 아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현재 미국에서 소송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자칫 소송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답변해 줄 수 없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전했다.동구씨가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을 추적한 끝에 제기한 소송이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코오롱, 창업부터 현재까지…

코오롱의 창업주는 고 이원만 회장이다. 고 이 회장은 한국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에 ‘개명상사’를 창업했다. 개명상사는 코오롱상사의 전신이다.이후 1957년 ‘(주)코오롱’의 전신인 ‘한국나이롱’을 설립하고 1963년에는 나일론을 국내 최초로 생산하며 국내 화섬산업의 기초을 닦았다고 평가받고 있다. 고 이 회장은 1969년에 ‘한국폴리에스텔’을 설립하고 1976년에는 ‘코오롱유화’를 설립했다.1977년에는 이동찬 명예회장이 코오롱의 수장을 물려받았다. 2대 회장으로 취임한 이 명예회장은 ‘근면·성실’을 모토로 그룹을 경영, 그룹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이 명예회장은 1983년 ‘고려나이론’을 인수하고 1985년 부터는 필름, 비디오 테이프, 메디칼 부분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또 1988년에는 ‘코오롱전자’, 1990년 ‘코오롱정보통신’, 1994년 ‘신세기통신’ 등을 설립하며 사업을 확장했다. 1996년부터는 3대 회장으로 이웅렬 회장이 코오롱을 맡고 있다. 이 회장은 신세기통신의 주식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에 주력하는 한편 과천에 사옥을 완공했다. 이 회장은 ‘디지털 플러스’경영을 전개했다. 디지털 플러스 경영이란 기존의 코오롱 문화에 디지털 경영을 접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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