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라는 단어가 우리 국민에게 그다지 살갑지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오랜 군사 독재의 전횡과 관료주의 획일 문화가 빚어 낸 위정자들의 권위의식은 국민을 억압하고 민주적 정서를 압박해서 군림하는 사향(思向)이었다. 그렇기에 군사문화의 퇴장과 더불어 밀어닥친 정치권의 탈권위주의 선언은 도저히 배반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 십 년 세월 동안 군사 독재 권력과 맞서 온 양 김, 즉 YS와 DJ의 민주화 투쟁 과정에 대중적 호응과 지지가 만들어 낸 특별한 카리스마가 집권 후 그들에게 누구도 범접 못할 권위를 부여케 했다. 문민독재라는 말이 생겨나고 이념 독재가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그 같은 두 사람의 카리스마에 기인한 권위적 동질성 때문이었다. 2002년 12월 대선 당시 충분히 유리한 고지를 선점해 있던 이회창씨가 무너지게 된 이유 가운데는 이씨 특유의 귀족적 권위가 유권자들에게 부담스러웠던 측면을 뺄 수가 없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에 이르도록 숱한 역경을 견뎌낸 흔적이 그대로인 듯한 현 노무현 대통령의 서민적이면서도 도전적으로 고착된 이미지가 권위의식과 아랑곳 없이 민중과 가까이 느껴진 점이 이회창씨와 대별되는 강점으로 부각됐었다. 전화위복의 화신처럼
노무현 후보가 집권하면 반세기 가까이나 이어온 수구문화를 뒤엎고 세상을 한번 바꿀 것이라는 기대를 모은 것이 사실이고, 그러한 민중의 바람은 노정권 내내 벗어나지 못할 통치이념의 족쇄가 될 수밖에 없는 태생적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꿈같은 참여정부 입성 후 노대통령의 지도력은 자신의 주장처럼 거대야당과 보수 언론에 의해 계속 상처를 입었고 급기야는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그리고 몰아친 후폭풍은 지난 대선 투표일 불과 하루 전에 있었던 정몽준의원의 노무현후보 지지포기 선언이 오히려 지지 세력의 결집이라는 전화위복의 결과를 만들어 냈던 것 이상으로 국민은 열린우리당의 거대화라는 엄청난 통치기반을 노대통령에게 안겨줬다. 실로 얼마만의 여대야소 정국의 회복인가. 모르긴 해도 전화위복의 화신처럼 돼버린 노대통령의 감개무량함이 형언키 어려웠을 것이다. 상처 받은 영광이라고나 할까. 강한 자신감에 탄력이 더 해진 노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가 시작될 것이란 전망 속에서 국민 각 계층은 처한 입장에 따라 기대와 우려가 크게 엇갈리는 형국이다. 갑자기 비대해진 열린우리당이 정체성을 의심 받을 정도로 논리에 일관성이 없는 까닭 역시 그들 집단이 잡탕이어서라기 보다 대칭되는 국민여론을 의식한 표리의 이반현상이 아닌가 한다. 질서, 믿음, 권위
집권당의 모습이 카리스마적 획일문화에 압도되어 다양성이 침몰 당하는 것은 민주주의 근간을 해치고 위협하는 것으로 가차 없이 배격해야 할 독재문화에 틀림없다. 하지만 다양성이 존중돼야하는 것과 질서 없이 내부 충돌하는 그림은 엄연하게 다른 것이다. 대통령의 말과 장관의 말이 다르고 여당 국회의원 말이 제 각기 다를 때 이익집단을 비롯한 사회 각 분야가 혼란에 휩싸일 것은 물론 우방국들의 대 한국노선에도 혼선이 올 것은 자명하다. 더욱이 파장이 국론 분열현상으로까지 치달을 때는 통치자의 지도력이 크게 상처입고 국가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집권세력이 빨리 질서를 회복해서 국민에게 믿음을 줘야한다. 우리는 선(善)이고 상대는 악(惡)이라는 분열적 사고에서 나오는 전쟁 논리를 접고 오직 민생을 위할 수 있는 실용적 개혁에 몰두하는 쪽으로 일사불란해질 무렵 비로소 국민이 안심하고 그들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지도자의 리더십은 조직의 질서를 바로해서 믿음을 줄 수 있는 영향력과 논리적 배치가 없을 터이고 또한 그것이 민주적 권위를 생산하는 첩경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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