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시현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갑자기 우리사회가 미래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뒷걸음질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서 소모적 논쟁을 일으키는게 무엇을 위하고 얻고자 하는 것인지 뻔한 속내를 전혀 짐작 못할 바는 아니다.그러나 어려운 세상을 살아오면서 온갖 궂은 일, 험한 꼴을 함께 보고 겪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 와서 옛날에 할 수 없었던, 또 못다 했던 시비를 어떻게든 다시 시작해서 제발 좀 속 시원한 거동을 보자는게 아닐 것이다. 행여라도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국민적 동의를 정치 목적에 이용하려 들면, 그건 역사를 이용한 또 한부분의 한풀이 역사를 진행시킨 것으로 국민 여망을 배신한 역사적 범죄행위였다는 평가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공부해서 유신헌법에 의해 판사를 하고 출세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해서 지금껏 어느 누구도 대놓고 그걸 문제 삼은 사람이 없다. 만약 그게 시비거리가 된다면 우리사회 전체가 온갖 연좌에 걸려 옴쭉달싹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연좌제의 칼 끝은 집요했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하면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의 난’이 일어나고 뒤이어 일어난 병자호란의 국치가, 국경 밖으로 달아났던 이괄의 잔당들이 고국을 배신하고 오랑캐‘후금(청)‘을 부추기고 침략의 길잡이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이씨왕조는 평안도 백성을 평한(平漢)으로 불러 아예 그쪽 사람들의 등용문을 막아놓았다. 말 그대로 지역연좌였다. 그 결과 한 맺힌 평안도 민심은 완전히 이씨 조정에 등을 돌렸고 급기야는 ‘홍경래의 난’을 촉발 시키기에 이르렀다.불과 어제까지의 현대사를 또 보자. 반공이데올로기를 절대적 국가 이념으로 삼은 냉전시대 때 ‘빨갱이’로 지목받은 인물이 가족 중에는 말할 것 없고, 사돈에 팔촌 범위에라도 들어있었던 집안 꼴이 어떠했던가. 대한민국 땅에서는 옳게 발붙이고 살아낼 재간이 없을 정도로 연좌제의 칼끝이 집요하게 그들 집안을 괴롭힌 게 사실이다. 군사독재 정권이 김대중씨를 빨갱이로 몰 무렵 호남 출신 공직자들이 불이익 당한 것 역시 지역연좌에 다름 아니다.한 많은 민족답게 우리는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한(恨)을 생산하는데 몰두해 온 것이다. 정치적 기반이 상대적으로 형편없이 약해보였던 현집권세력이 정권 쟁취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따로 없었다. 국민이 함께 참여해서 국가의 밝은 미래를 열어보자는 호소가 한풀이 정치에 몸서리치는 유권자의 심금을 울린 까닭일 것이다. 그물에 안 걸릴 거물급 지도층이 없다
그런데 고작 유신시대 잔재를 이 시점에 애써 들춰내고, 5공 때의 주소를 따지고, 김영삼정권 때, 김대중정권 때를 가리는 따위의 연좌제 망령이 되살아난다면 나라 장래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식으로 그물을 치고 발목을 잡으려 한다면 이 땅의 정계, 관계, 재계, 언론계, 사회단체를 망라해서 안 걸려들 거물급 인사가 있을 것 같지가 않다.온통 정치적 욕심에만 매달려 편을 모으고 그 위세를 과시하여 온갖 명분과 구실을 짜내 상대 당파 죽이는 일로 날을 지새운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누군들 모르지 않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정치권이 대체 나라를 어디까지 끌고가자는 속셈들인지 도무지 속내를 모를 일이다. 여하튼 국민 대다수는 어떤 명분으로도 싸움질 하는 데는 아주 질려 있다. 지금 정체성 논란이 한창이지만 그 역시 논란의 핵심 보다는 나라 경제가 지극히 어려운 판에 국가 분열의 골이 더욱 깊어지기만 해서 이제 상생정치의 희망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이 날 새 버렸다는 국민 반응이 주류일 듯하다. 끝내 우리는 이렇게 한(恨)만 생산해 가야 할 일인가. 그게 국운(國運)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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