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늦더위를 지나고 겨우 가을 문턱에 들었는가 싶던 것이 벌써 아침저녁 날씨가 겨울 한파를 재촉한다. 추석 절기에 무르익은 오곡백과를 보며 모처럼 훈훈하고 풍요함을 맛 본 것이 잠시였던 것 같다.지금의 기상 상태로 봐서 앞으로 열흘 정도 지나 11월에 접어들면 우리는 얼어붙은 마음에 몸까지 한껏 움츠리게 될 것이다. 우리를 움츠리게 하는 것은 밀려오는 한파 때문만이 아니다.국회 국정감사 실황을 지켜봤듯이 이 땅의 정치가 국민이 따뜻함을 느끼고 미래를 안도할만한 희망 있는 쪽으로 굴러가지 않는데 대한 절망스러움이 더욱 한기를 느끼게 할 것이다.열린 우리당은 11월 내에 밀려있는 개혁 숙제를 어떻게든 마무리 짓겠다고 한다.말하자면 대치 국면에 갇혀있는 ‘수도이전’ ‘국보법폐지’ ‘친일 과거사 규명’ ‘언론개혁’ 법안을 그때까지 다수당의 힘으로 관철시키고야 말겠다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서두르는 속내를 전혀 짐작 못하지는 않는다.5년 단임제 정권이 2년을 지나면 사실상 정권 후반기의 권력 누수현상이 일어난다는 점을 인식했을 법도 하다. 또 적지 않은 수의 열린 우리당 소속 의원들이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고 있어 대법원 확정 판결에 따라서는 다수당의 입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감도 작용됐을 것이다. 게다가 고정 지지층마저 등을 돌리는 현실이 불안하고 초조하기도 했을 것이다.이런 복합적인 연유에서 집권세력이 말마따나 정권의 명운을 걸고 오는 11월안에 법안 통과를 위한 사생결단을 시작할 것임은 이제 불 보듯한 일일 것 같다. 설사 타협의 여지를 쫓는 쪽이 있다 해도 이미 권력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는 주도세력의 충혈된 눈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지금 공직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는 사정 작업도 왠지 지상매괴(指桑罵槐), 즉 겉으로 회나무를 야단치지만 속으로는 뽕나무를 경고하는 뜻이 큰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렇게 보면 개혁해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도무지 변할 줄 모르는 권력의 못된 속성부터지 싶다.노무현 정권은 행정 권력과 함께 문민정권 이후 처음으로 국회 권력까지 장악했다. 우선 지도자의 요건 가운데 하나인 권력 장악 능력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까 힘으로 밀어붙이면 못할 일이 없는 무소불위의 위용을 갖춘 것이 사실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래서 권력자가 마음먹은 대로 한번 해보겠다면 반대세력이 취할 수단 역시 뻔하게 정해진 외길 선택뿐일 것이다.보나마나 국민여론을 담보로 거리로 나설 것이 자명하다. 그럼 나라는 계속 혼란에 빠져 허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이럴 때 우리는 지도자의 살림살이 솜씨가, 또 지도자의 역사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애국이라는 명분과 명예가 영원히 남는 보석처럼 빛날 수 있는 것은 나라 사랑이 곧 민족 사랑이었기 때문이다.어떤 명분으로도 민심을 외면하고 국민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의 개혁은 애국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11월의 진검 승부를 대비하고 있는 정치권, 특히 집권 여당은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미고 ‘제발 먹고 살게 좀 해 달라’고 절규하는 국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또 국가 경쟁력이 세계 29위로 급락한 이 시점에 민생문제와 직접 관련 없는 대목에서 살기 등등히 대치하고 있는 정치상태를 대다수 국민들이 저주하고 있는 정황을 똑바로 살펴야 할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개혁의 궁극목표는 보다 사람답게 잘살아 보자는 것일 게다. 그런데 지금 나라꼴을 보라. 수도이전 문제를 놓고 피나는 기득권 싸움이 빚어지고, 보안법개폐 논란이 몰고 온 좌우충돌, 친일과거사 논쟁이 일으킨 증오와 적개심, 이런 가운데 신문은 신문끼리, 방송은 방송끼리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는 현실이다.이 모든 것들이 국가 미래를 열기 위함이라고 끝내 우길 배짱이 아니라면 2004년 11월의 대한민국은 모두가 서로 화해하고 용서하는 연말을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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