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자식이 웬수지…’ 아마 나이든 세대에게는 낯설지 않은 푸념일 게다. 어린 시절을 자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또는 다른 어른들 입을 통해 들어본 기억이 없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철들어 어른이 되고 스스로 자식을 두기 전까지는 ‘자식이 웬수’라고 자조했던 어른들의 한을 깊게 깨닫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일 것이다. 다른 건 다 몰라도 자식을 위해 봉사하고 자식 때문에 자신을 기꺼이 희생해야만 했던 부모 마음, 또 자식의 고통을 내 아픔보다 더한 아픔으로 여겨 자식이 ‘웬수’라고 탄식했던 부모 마음만은 저도 자식을 키우면 저절로 알 것이라고 했다.더욱이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이 두려운데다, 보다 여유 있는 생활을 추구하는 맞벌이 신세대 부부가 늘면서부터 야기된 외톨이 자식 시대의 자식 사랑은 집착이라는 표현이 옳을 정도다. 그러면서도 제 부모의 늙고 병든 모습을 귀찮아하다 못해 몸에 돋은 혹처럼 여기는 천벌 받을 행태가 이제 어쩌다가 일어나는 말 안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전국의 복지 시설이 버려지는 부모들로 넘치고 있다는 보도가 진작부터였다. 시설에 맡긴 어머니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도 시설 측에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식에게 연락조차 안 해도 된다는, 말하자면 ‘자식 포기각서’를 자식이 쓰고 있다고 한다. 복지시설에 조르고 사정해서 자식을 찾아가도 문을 안 열어주고 나중에는 이사를 가버린다고 한다. 어렵게 연락된 손자 손녀가 ‘그 할머니는 우리 엄마와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라며 전화를 끊는다는 보도도 있었다.또 불황 때문에 병든 부모명의 재산을 가로채고는 하루아침에 알거지로 변해 거동도 못하는 부모를 팽개치고 잠적한 사례도 드러났다. 버림당한 ‘모’씨 경우는 나이가 65세 미만인데다 호적에 부인과 아들의 이름이 올려져 있어 노인 복지 시설에 입소할 자격이 안됐다. 때문에 겨우 겨우 양로원에 들 때까지 8개월간을 야산에서 생활한 것으로 밝혀졌다. ‘모’씨는 ‘그놈(자식)들에게 원수를 갚기 전엔 죽을 수도 없다’며 피맺힌 절규를 했다는 기막힌 소식도 아울러 전해졌다.급기야는 자식이 ‘웬수’라는 자조 섞인 한탄이 아니라 내가 낳은 자식이 진짜 ‘원수’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기막히고 처참한 일들이 밀어닥친 불황 때문이라면 갑자기 경제 호황이 오지 않는 한 유사한 패륜 사건은 부지기수로 늘어날 전망이다.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에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고개를 ‘보릿고개’라고 했었다. 그 시절 먹는 입을 덜기 위해 딸을 남의 집 살이 보내고, 아들을 부잣집 머슴살이 시켰다는 말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들이 힘없는 부모를 가난 때문에 어떻게 했다는 말은 그 유명한 ‘고려장’역사를 빼놓고는 자고로 들어 본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병들고 힘없다 해서 부모를 내다 버리고, 부모 재산을 깡그리 도적질한 후 병든 부모를 팽개치고 도망치는 행위가 비일비재해진 망나니 세상이 돼 버린 것이다. 굳이 천벌을 입에 담을 필요는 없지 싶다.바로 자신의 애지중지하는 자식이 제 부모가 하는 짓을 똑똑히 배우며 익히고 있다는 사실이 이미 천벌의 시작일지도 모를 일이다. 훗날 자식에 의해 자신이 부모에게 했던 그 모양 그대로를 답습 당하게 될 때면 천벌이 따로 있지 않았음을 깨닫게도 될 것이다.부모의 행동과 몸가짐이 커가는 자식들 인격 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부모가 곧 자식의 사표(師表)라고 하지 않던가. 그럼 우리는 언제까지고 잘못된 세태만을 한탄하고 있을 계제가 못된다. 최소한 가족의 개념만은 가르치고 실천하는 학부모가 돼야 한다.모두 입으로는 애국을 말하고 있지만 가족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나라 사랑을 알 턱이 없다.2004년 11월 28일 <제5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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