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시험 부정이 비단 광주뿐 아니라 전국적이었을 것이라는 예측이 빗나가지 않았다. 전국 일원에 조직적인 부정 사례가 감자 줄기 파헤쳐지듯 모습이 드러나면서 끝없는 충격을 주고 있다. 언제 수사가 단락될지 가늠조차 어려운 지경으로 파문이 확대되고 있다. 광주에서는 각계 원로들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원로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대대적인 윤리 회복에 나서겠다며 학생들을 옳은 길로 이끌어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어른들의 책무라고 했다. 따라서 이번 학생들의 죄는 곧 모든 시민의 책임이라고 못 박았다.그렇다. 반칙의 비열함 보다는 ‘모로가나 거꾸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된다’고 말하고 가르친 어른들이 모두 종아리 걷고 매 맞는 심정으로 석고대죄를 청해도 이미 때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늦었다는 것은 지금 이 땅에 아버지의 자리가 좁아지고 있음은 물론 어느새 아버지 역할이 포기 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서이다.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할지 모르지만 우리 아버지들이 정말 아버지 몫을 옳게 다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신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지 의문스럽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오로지 처자식을 위해 땀 흘리고, 봉사하고, 특히 자식이 원하는 것에는 물, 불 안 가린 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한 아버지냐는 잣대를 들이밀면 또한 할말 없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자니 자식 교육을 엄마의 몫으로 넘기고, 경제권을 알게 모르게 모조리 아내에게 이양(?)시킨 가정이 태반은 넘을 것이다. 남편으로부터 노획(?)한 경제권으로는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이 어려워 돈 벌려고 탈선까지 서슴지 않는 주부들 이야기가 뉴스판을 휘저은 적이 드물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은 황금만능을 뼈 속 깊이 깨달았고, 돈에 관한 한 창구 일원화된 엄마의 위대함(?)에 의존하며 자랐다.맹모삼천을 뺨치는 엄마의 극성이 더해질수록 아버지의 훈육이 먹혀들 자리가 없어졌던게 사실일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많은 아버지들이 스스로 아버지의 권위를 포기했다는 표현이 옳을지 모른다. 권위라는 말을 오해할 필요는 없다. 내가 말하는 권위는 가부장제(家父長制)의 향수를 되살려 보자는 그런 것이 아니다.가정 경제권을 아내에게 바친 남자, 집안문제에 지나치게 아내 눈치를 살펴야 하는 남자, 아내의 눈길이 무서워 자식에게 회초리를 들 수 없는 남자, 아내의 거침없는 핀잔에 주눅들어 하는 남자, 이럴 때 아이들 눈에 비친 아버지 체모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아버지의 권위 따위는 진작에 아이들 엄마 앞으로 고스란히 헌납(?)해버린 가정이 적지만은 않을 것 같다.아버지가 가정 책임자로서의 권위를 잃어 버렸거나 포기한다는 것은 되는대로, 편한대로 살자는 것과 다르지 않은 이치다. 되는대로 살기 위해서는 소신과 아랑곳없이 비굴한 타협을 능사로 해야 할 것이다. 또 편한대로 살기 위해서는 원칙과 질서를 무시하고 반칙을 최상의 수단과 요령으로 신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칙을 존중하고 질서를 지키는 사람이 융통성 없고 꽉 막힌 무능한 사람 취급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강하게 부정할 수가 없는 세상이 돼버렸다. 세상 물정이 이런 가운데 엄마와 더불어 아버지 훈육이 포기된 가정의 아이들이 뭘 보고 어떤 것을 배우고 익히는지는 물어 볼 것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 이 땅에서 일어날 아이들 문제가 어디 수능시험 부정행위 만이겠는가. 반칙과 줄서기에 익숙지 못하면 출세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깨지지 않는 한 더 한층 지능화된 비리행위나 부정사건은 돌발 아닌 항시 예비된 형태로 나타날 것이 뻔하다. 그럼 어째야 되는가. 세상 변한 것만 탓하며 한탄만 해야 될 것인가. 최소한 아버지들이 아버지 몫이라도 옳게 하면 좀 나은 세상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아버지들이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잃어버린 아버지 권위를 회복해서 집안 장래를 지키는 자식 훈육에 나서면 세상이 오늘 같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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