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라 사정이 왜 이런가.정말 경제 불황 때문만일까. 물론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 이라고 했듯이 먹고 사는 문제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쪼들리는 살림살이가 계속 되다보면 다른 것에 눈 돌릴 겨를이 없을 것이다. 나라법을 바꾸고 제도가 달라지는 것이 미래에 어떤 희망을 주는 것인지, 또 얼마나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해(害)가 될지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 가지고 살필 여유도 없지 싶다. 때문에 배고픈 국민들은 4대개혁 입법이고 뭐고 간에 우선 민생문제부터 해결하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집권여당도 그 같은 민심을 알기 때문에 목표만을 향해 마냥 강공 드라이브로 밀어 붙일 수만도 없는 현실적 딜레마에 빠진 모습이 역력하다.야당 역시 야당 정치에 익숙지 못한 까닭인지 소수의 한계에 갇혀 우왕좌왕이다.딜레마에 빠진 여권 지도부가 보안법 폐지 법안을 절대로 이번 회기에 상정시키지 않겠다고 오늘 선언한 것이 내일이면 뒤집어지는 현실, 그 와중에서 국회 모습은 무법천지의 뒷골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가까스로 원탁에 나와 앉아 합의한 내용도 그 다음날엔 말짱 없던 일이 되는 야바위 정치는 아예 국민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식이다. 이게 집권 세력이 자고 뜨면 말하던 미래지향적인 첨단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라면 소가 웃을 노릇이다. 지도력 부재라는 돌팔매 속에 서로 책임회피에 급급한 여야 지도부의 초라한 모습은 차라리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배고픈 국민들이 이제나, 저제나 했던 나라꼴이 이렇다.많은 국민들은 이제 이 땅에 정치가 실종된지 오래이고 정치가 죽었다는 생각도 할 것이다. 이렇듯 끝없는 자괴감에 빠져든 국민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그때가 좋았지’ ‘아-옛날이여’를 노래하며 향수에 젖는다.집권세력 내부에서도 이들의 향수가 암흑기의 뒤안길을 더듬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같은 국민들을 덜 떨어진 보수 세력으로 몰아 적개심을 일으키는 자체는 자격지심의 발로로 설명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국민은 집권세력이 그토록 혐오해서 반드시 청산돼야 할 과제로 못 박았던 카리스마 정치에도 새로운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군사독재 시절은 접어두고 김영삼, 김대중 두 김씨가 국내정치를 지배할 때의 우리 정치는 비교적 여론 앞에 명쾌하려고 애썼다. 더 나아가 멋있는 화합정치를 선보이고 정치 예술까지를 실감케 했던 적이 없지 않다. 부정적인 측면을 따지자면 보스정치, 패거리 정치의 폐해를 빼놓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때는 양김(兩金)의 우산 밑에서 빨리 한번 커 보겠다는 속셈으로 튀는 행동을 연출하고 난장판을 만들어 국민을 불안케 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보스의 눈만 쳐다보고도 그 뜻을 헤아려 당론을 모아냈다. 일단 정해진 당론을 거역한다는 것은 정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했다.덕분에 국민은 정치판의 시끄러운 모습에 가슴을 졸이다가도 어느 틈에 화해하고 합의하는 멋진 장면을 대하고 안도할 수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의 개혁국회(?)처럼 새파랗게 젊은 여당의 초선의원이 날치기 법안 상정을 막기 위해 위원장석을 점거하고 있는 다선의 나이든 야당 의원에게 ‘여기가 동물원이야, 웬 노인네가 앉아있어’하는 따위의 막돼먹은 정치판에 혀를 찼던 기억은 별반 없다.며칠 전 열린우리당의 이철우의원 문제가 새로운 쟁점으로 떠오르자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몇몇 한나라당 의원들을 빗대서 ‘정말 이상한 국회의원들이 17대 국회에 많이 들어왔다’고 했다. 이는 아마 많은 국민들이 적반하장을 입에 담을 만한 대목일 것이다.우리 편 아니면 모두 적으로 하는 정치, 국민을 갈라놓는 정치, 당론이 먹혀들지 않는 정당정치,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치 않는 정치, 선배의 경륜이 무시되는 정치, 국민이 싫다는 것을 힘으로 밀어붙이려는 정치를 살아있는 정치로 볼 사람은 없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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