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우리 국민만큼 ‘비상’이란 단어에 익숙한 국민도 지구상에 드물지 싶다. 군사 독재정권이 정권 보위나 탈취를 위해 국민을 묶어 놓은 수단이 ‘비상사태’선언 이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비상계엄령에 주눅 든 시절, 비상시국을 내세워 인권 유린을 당연시했던 시절, 말 못하던 어린애가 가장 먼저 익히는 사회적 용어가 ‘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상(非常)의 뜻은 익히 아는 대로 정상(正常)이 아닌 긴급 사태를 말함이다. 거센 민주화 요구로 군사독재 문화를 걷어내고 난 뒤 잠시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비상’의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듯했다.그러나 민주화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빚어진 노사 현장의 비대위(非對委)투쟁이 또다시 우리의 귀를 괴롭히고 마음을 불안케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가운데 국민 대화합을 내세운 오늘의 참여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심한 우여곡절 끝에 정말 모처럼의 여대야소 정국이 이루어지기도 했다.이제 남은 문제는 집권여당이 초심을 지켜서 통합의 상생정치를 실현시키는 문제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집권 2년이 지났다.그 사이 집권당 대표가 세 번씩이나 바뀌는 모습을 국민은 불안한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그에 대해서 발전적 변화였다고는 집권당 스스로가 어떤 명분으로도 강변할 처지가 아닐 것이다. 끝내는 네 번째 들어선 지도체제가 근래 들어 노사 분규장에서나 들어봤던 ‘비대위’체제로 급조되기에 이르렀다. 열 번을 생각해도 한심하기가 짝이 없을 노릇이다.국민은 ‘비상’어쩌고 하는 말만 들어도 넌더리가 날 판이다.혹시 그 같은 집권당 상황이 경제위기 탈출을 위해서라면 어떤 국민도 이해 못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해 마지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열린 우리당의 비상체제 전환은 국민경제 위기와는 아무 상관조차 없는 여권 내부 문제 때문임을 삼척동자도 안다. 누가 그들 위기를 유도한 것도 아니다. 많은 국민이 싫어하는 걸 그냥 밀어붙이지 못해서 그 모양이 난 것이다.위기를 선언한 것도 그들 스스로다. 야당과 부닥칠 때마다 다수당의 위세를 과시해 온 터에 말이다. 전당대회를 불과 3개월여 앞두고 그처럼 비상지도체제로 돌입한 열린우리당이 앞으로 국민에게 나타낼 그림이 뻔하다. 당내 노선 갈등에 따른 대립각이 일시 수면 아래로 잠긴 듯해 보이지만 더욱 첨예해질 것이 시간문제일 듯하다. 전당대회를 앞둔 당권 경쟁이 치열해질 것도 자명할 터이다. 같은 맥락으로 2월 임시국회도 지난 연말 국회 모습을 재연할 공산이 짙다. 그럼 언제 여당정치가 민생문제를 들여다 볼 여유를 찾을 것인가. 빨라야 전당대회를 끝낸 4월 이후 쯤이 될 것이다. 이때는 이미 2005년도 상반기를 지난 시점이 된다. 특단의 경제대책이 나오기도 힘들겠지만, 그래봐야 실효를 거두지 못한 채 또 한해를 마감하는 비관적 상황이 예상될 뿐이다.그러면서도 여당 움직임을 주목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밉거나 곱거나 정치가 국정 운영의 중심축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까닭이다. 그 나라 장래와 국민생활의 안정은 정치적 리더십에 따라 결정지어지는 원론적 이치를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집권 여당이 순전히 당내 갈등으로 해서 집권당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비상 임시 지도체제를 연데 대한 역사적 책임을 알기나 하는지?현시점에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것은, 또 국민이 반길 일은 정부 여야 정치권이 망라된 비상 경제 대책일 것이다. 그것이 또한 이 땅의 정치가 달라지는 시작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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