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놀라울 정도로 변했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고 외쳤던 산업화시대의 최고 가치는 가난 극복을 위한 황금의 축적이었었다.따라서 잘 먹고 잘 살게만 해주면 제도적으로 자유를 좀 속박당하고, 부패했거나 애초부터 자질 없는 권력이 알게 모르게 국민을 압박해도 함께 참을만 했는지 모른다. 오로지 시장 자유에만 관심 있어 했던 시절일 것이다.그러나 국민이 어느 정도 배 불려지고 난 뒤부터의 시대상황은 딴 판으로 변했다.그때까지 잠재돼 있던 민주화에 대한 국민욕구가 한꺼번에 봇물 터진 듯 급류를 타기 시작한 것이다.이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가치의 중심에 두는 민주화세력이 거세진 국민의 민주화 열망에 힘입어 집권에 성공했다. 그리고 10년 넘게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에는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이 때로 마찰음을 내면서도 서로 타협하는 길을 모색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최대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김대중 전대통령이 오히려 ‘동서화합’의 명분 아래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추진했던 것이 무엇보다도 극명한 사례가 될 것이다. 당시 국민들 생각도 바로 이런 것이 정치의 최고 가치인 종합성, 국민통합의 실천으로 인식됐을 법하다.어쩌면 이때가 국민 대통합을 이룰 절대적 호기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봐서는 아마 그런 기회가 두 번 올 것 같지 않다. 갑자기 밀어닥친 가치관 충돌은 이제 세력간의 기 싸움을 벗어나 죽느냐 사느냐의 확전 양상이 갈수록 치열해 보인다.당초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간 갈등처럼 나타난 것이 점차 이해에 따른 갈래가 지어지고 더욱 첨예화되는 느낌이다.민주화세력 내에 노선갈등을 빚는 내막도 크게 보면, 지난 날 같은 부엌에서 한솥밥을 지었지만 밥상을 달리했던 신기득권 세력과의 충돌현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국가통제가 아닌 자유시장을 중시하는 산업화세력과 신세력이 결집하는 상태가 국민 갈등으로 이어져서 국론분열로 나타나는 현실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그들 모두가 궁극으로 삼는 목적만큼은 다를 수가 없는 듯하다. 즉 ‘선진한국’을 목표로 선진화세력의 시대를 열겠다는 생각은 확실히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럼 지금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충분한 실마리는 이미 풀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하고자 하는 목적과 생각하는 목표가 다르지 않다면 남은 과제는 인식의 통합 문제일 것이다.인식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불신의 벽을 넘어야 함은 말할 게 없다. 벽을 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또 대화가 옳게 이루어지려면 부패 죄의식과 비주류 열등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세력이 중재를 맡는 방안도 있을 줄 안다.그렇지 않고서는 지금의 난국을 풀어낼 방법이 도저히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런 다음 여야 정치권을 포함해서 ‘선진화 견인 역’을 자임하는 세력이 ‘선진한국’이라는 화두를 국민 속에 심화시키고 구체화하는 일에 나설 것을 기대해 본다.우리가 2005년을 시작한 지도 벌써 설 연휴를 지난 시점이다. 다른때보다 길었던 설 연휴 기간에 드러난 바닥 민심도 정치권이 여과 없이 파악했을 줄 믿는다. 조금 있으면 산업현장 노동 단체들의 또 다른 춘투(春鬪)가 예상되기도 한다.이런 판에 더 이상 국력을 정쟁에 소모할 때가 아니다. 노선 갈등으로 나라를 찢어놓는 것이 ‘선진한국’을 여는 첫 단추는 분명히 아닐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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