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언론의 실체적 역사는 개화기였던 구한말에 ‘독립신문’을 발간하고부터일 것이다. 당시 기자를 고원(告員)으로 불렀고 길가에서 신문을 파는 방식은 지금의 가판대 판매나 발로 뛰며 판 것 말고는 특별히 다를 것이 없었다. 그때도 기사에 불만 있는 세력이 신문을 해코지하려는 버릇 또한 다르지 않았다. 고원이나 신문판매원을 보기만 하면 꼭지떼들이 폭행을 가하고 달아나는 수법으로 신문의 험난한 운명을 예고했었다. 꼭지떼는 소외받는 전과자들을 중심으로 청계천변에 움막을 짓고 걸식 행각으로 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던 부랑배 집단이었다. 불감청(不敢請)이나 고소원(固所願)이라 당연히 세도가나 돈 있는 사람에게 매수되어 청부 폭력을 일삼았을 무리들이다. 신문이 생기기 훨씬 더 옛날에는 ‘은어서(隱語書)’와 ‘참요’라는 게 있었다. 은어서란 것은 고발 기사를 넙적한 돌이나 기왓장 같은데 써서 사람 왕래가 많은 곳에 갖다놓아 여러 사람이 보도록 했던 일종의 소자보였던 셈이다. 참요란 말 그대로 노래를 만들어 입과 입으로 구전시키는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입방아 방송이다. 이에 얽힌 사연이 많다. 신라 때 진성여왕의 난잡한 사생활을 고발하는 은어서가 나돌아 여왕이 역사(力士)들을 보내 테러 보복을 가한 것이나, 신라 경문왕의 지나친 호색을 고발하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참요가 나돌았을 때 그 노래의 진원지였던 도림사 일대를 쑥밭으로 만든 일화가 전해진다. 또 조선시대 숙종 때 빚어졌던 민비와 장희빈의 궁중 암투에서 ‘장다리는 한철이요 미나리는 사철이라’는 참요가 민비쪽으로 민심을 모으는데 큰 작용을 한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일제 때의 언론 테러는 여기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회의 공기(公器)인 언론은 사기(私器)의 검은손에 상처 받지 않을 수 없는 숙명을 여과없이 느낄 만하다. 해방 후 민주공화 정부가 수립됐지만 우리 언론 현실은 조금도 변화된 환경이 아니었다. 신문사 숫자가 크게 늘어난 것 말고 말이다.정부 비판신문의 필봉을 꺾으려는 꼭지떼나 깡패 양아치 집단의 발호가 오히려 더해졌을 뿐 아니라 군사 정권 때의 당근과 채찍을 조화시킨 언론 길들이기는 어용기자 전성시대를 열었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권의 색채가 신문사 운영의 희비를 가른 것은 꼼짝없는 한국 언론의 숙명적 애환(哀歡)일 것이다.특히 근래 발생했던 특정 정치인을 따르는 무리가 특정 신문사 인쇄시설에 불을 지른 사건은 무법천지였던 해방 직후의 테러리즘을 빼 박은 듯해서, 현집권세력의 언론개혁론 역시 빤한 저의를 겹겹이 포장한 이론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흔히 요즘 세상이 어쩌고들 말한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마음먹고 신문사 몇 개쯤 죽이려들면 그까짓 여론몰이쯤은 오히려 어렵지가 않은 현실이다.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과거 이데올로기적 냉전 사고에서 벗어나 요즘같이 국민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때일수록 낯선 논리가 먹혀들 소지가 넓다. 더욱이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관점으로 충돌하고 있는 개혁 논쟁에서는 힘 가진 세력이 얼마든지 여론을 원하는 쪽으로 키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기교 있고 합법적인 형태로 입맛에 안 맞는 언론을 고사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정권은 훗날 다른 정권으로부터도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단’ 용기 있었던 정권으로 평가될 법하다.때문에 오늘의 몇몇 언론은 신문사가 꼭지떼의 밥이 됐던 때가 차라리 좋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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